【청주일보】페북에서 김홍순 = 이 잠언은 잘 알려진 것처럼 고대 희랍의 델피(아폴로)신전 입구 현판에 새겨진 경구다. 그것은 애초에 '인간아! 깨달아라, 너는 신(神)이 아님을' 혹은 '너는 기껏 사멸할 인간임을 명심하라!'는 뜻이었다.


그와 같은 의미는 또 다른 델피신전의 경구인 '메덴 아간(Μηδὲν ἄγαν'), 곧 '덤비지 마라!'라고 풀이되는 말과 함께 더욱 강조되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Socrates, B.C. 469~399) 이래로–그의 제자 플라톤이 되새겨 전해주는 바(Alcibiades Ⅰ 129a~133c)에 따라–'너 자신을 알라!'라는 충고는 더 이상 그렇듯 겸허해야 할 인간을 각성시키는 자성의 목소리가 아니라, 오히려 '신과 대면하여 그를 알아볼 수 있는 인간의 놀라운 능력'을 회복하라는 고무적인 목소리로 반전(反轉) 혹은 발전했다.


소크라테스는 부인 크산티페와 23살 작가에게 모욕을 당한다.
뜬구름 잡는 허무맹랑한 몽상가, 해괴한 논변을 일삼는 협잡꾼” 발칙한 상상력으로 소크라테스에게 ‘굴욕’을 안긴 방년 23살의 작가 아리스토파네스.


기원전 423년, 아테네에 황당한 방화 사건이 일어났다. 범인은 평범한 농부 스트렙시아데스였고 대상은 학교였다. 그곳에서 교육을 잘 받은 아들에게 머리와 턱을 얻어맞고 짓밟히고 급기야 목까지 졸리자, ‘뚜껑이 열린’ 그가 자식을 망친 학교를 없애버려야겠다며 불을 지른 것이다.


망할 놈의 학교 같으니! 활활 타오르는 학교에서 연기를 뚫고, “아이고, 이거 큰일 났네, 숨 막혀 죽겠네.” 허둥대며 선생과 그 제자들이 뛰쳐나온다. 밖에서 기다리던 스트렙시아데스와 그의 하인이 쇠스랑을 들고 뒤를 바짝 쫓아간다.


망할 놈의 선생 같으니! 도망가는 선생의 이름은 소크라테스. 그렇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그 소크라테스. 일본인들이 예수, 부처, 공자와 함께 세계 4대 성인의 하나로 꼽았다던 바로 그 소크라테스다.

이 방화 사건은 사실이 아니라, 가상이다. 기원전 423년 대(大) 디오니소스 축제 희극 경연 대회의 무대에 오른 작품 <구름> 속에서 벌어진 상상의 사건이다.


작가는 아리스토파네스. 당시 약관의 나이(23살)였던 이 젊은이는 불혹의 나이(46살)에 아테네 지식인 사회에 돌풍을 일으키던 소크라테스를 겨냥하여 발칙한 상상력을 발휘하였다. 그가 그린 소크라테스는 흔히 알려진 진지한 철학자가 아니다.


“저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든 돈만 주면, 옳든 그르든 소송에서 이기는 법을 가르쳐주지.”(95~99) “사람들은 말하지, 저들에게는 두 가지 논변(logos)이 있는데, 그 하나는 ‘더 강력한 논변(正論)’이고, 다른 하나는 ‘더 약한 논변(邪論)’이라고. 두 논변들 가운데 ‘더 약한 논변’으로 말하면 더 옳지 않은 경우라도 논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거야. 만약 네가 나를 위해 이 ‘옳지 않은 논변(邪論)’을 배운다면, 지금 너 때문에 지게 된 모든 빚을 단 한 푼도 갚지 않아도 된단다, 얘야.”(112~118)


무대 위의 소크라테스는 뜬구름 잡는 허무맹랑한 공상가이며, 해괴한 논변을 일삼는 협잡꾼이다. 그는 구름의 여신을 섬긴다. 소크라테스는 법정 논쟁의 기술을 배우러 온 스트렙시아데스가 보는 앞에서 구름의 여신을 부른다.


“이리로 오소서, 오 무수한 존경을 받으실 분들이여, 이자에게 당신들의 모습을 드러내주소서.” “제 기도를 들어주시고, 제물을 기꺼이 받아주시고, 이 성스런 의식에 기뻐하소서.”(269~74) 기도를 듣고 구름의 여신들이 나타나자,


소크라테스는 여신들의 위력을 찬양한다. 구름의 여신들은 ‘구름을 모으며’ ‘크게 천둥을 치는’ ‘번개의 신’ 제우스를 가볍게 대체한다. “제우스? 뭔 제우스? 웃기는 소리 마시오. 제우스 따위는 없으니까.”(367) 구름뿐이다.


그리고 구름의 여신들이 떠도는 거대한 허공 카오스와 여신들의 힘을 세상에 구현하는 인간의 혀. 소크라테스에겐 세 가지 이외에 다른 신이 없다. 나머지는 모두 헛소리다, 헛소리.(423~4)


진리고 나발이고, 어차피 그런 것은 없다.


소크라테스는 자기나 그 당시 아테네 사람들이나 모두 무지하기는 마찬가지지만 자기와 아테네 사람들과의 차이는 자기는 자기가 무지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아테네 사람들은 자기들이 무지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이 말은 무지에도 두 종류가 있다는 뜻이다. 하나는 무지하기는 하지만 자기의 무지를 알고 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무지하면서도 그 무지를 모르는 것이다.


무지하면서도 무지를 아는 것은 희망이 있는 무지다. 자기의 무지를 자각하기 때문에 그 무지를 없애려고 언제나 겸손한 자세로, 그리고 열린 마음으로 참된 앎을 찾아 정진하는 태도를 갖게 된다.


이렇게 자기의 무지를 아는 것은 병이 아니다. 언제나 ‘마음이 가난한 자’의 태도를 가지고 새로운 빛에 스스로를 열어놓고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기의 무지함을 알고 이를 인정하는 무지는 사실 진리의 심오함과 인간이 지닌 생래적인 인식 능력의 한계성을 진정으로 깨달은 사람에게나 찾을 수 있는 태도로서 중세 철학자 쿠자의 니콜라스(쿠자누스)는 이를 두고 ‘박학한 무지’(docta ignorantia)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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