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세종=청주일보】김흥순 = 우정을 표현하는 단순한 고사성어가 아니다.
관자(管子), 관학, 포숙아(鮑叔牙), 제 환공(齊 桓公), 제자백가(諸子百家), 우정(友情), 역지사지(易地思之) 등 이해할 분야가 많다.

관중(管仲)은 중국 춘추시대 중엽 제환공(齊桓公)을 도와 사상 첫 패업을 이룬 재상이다.
포숙아(鮑叔牙)는 관중을 만든 친구다.

제 환공(齊 桓公)은 중국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 제(齊)나라(지금 산동성(山東省)의 제후(諸侯)로, 춘추오패(春秋五覇)의 한사람이다.

‘관중’과 ‘포숙아’의 이야기인 관포지교(管鮑之交)의 고사(故事)가 우정의 대명사가 된 이유는? 일반인은 따라하기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2700여 년 전 춘추시대 제나라 사람인 ‘관중’과 ‘포숙아’는 어릴 때부터 죽마고우(竹馬故友)로, 막역지교(莫逆之交)를 나누는 사이였다. 세월이 흘러 두 사람은 정치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순탄하게 지내왔던 두 사람의 우정도 거센 정치풍랑에 부딪치게 되었지만, 두 사람은 현명하게 양보와 이해로 꿋꿋하고 아름답게 지켜졌다.

당시 제양공(齊襄公)때, 폭정으로 인해 혼란에 빠져 있었다. 관중은 공자규(公子糾)를 따라 노(魯)나라로 달아났고, 규의 동생인 소백(小白)의 사부가 된 포숙은 제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공자 소백을 따라 거(莒)로 달아났다.

양공이 양공이 권력 쟁탈전 끝에 살해되고 나라는 혼란이 계속되어 군주의 자리가 비게 되었다. 그러자 두 공자는 서로 왕위에 오르기 위해 서둘러 귀국길에 올랐다. 이에 규는 관중을 보내 귀국길에 오른 소백을 암살하고 느긋하게 귀국길에 올랐으나, 소백은 천만다행(千萬多幸)으로 관중이 쏜 화살이 허리띠에 맞아 목숨을 구했고 부랴부랴 귀국해 군주의 자리를 차지하였다.

결국 소백에게 잡힌 규는 자결하였고 관중은 사형 집행을 눈앞에 두었다. 이때 포숙이 나서서 소백에게 말한다.

“전하, 전하께서 제나라에 만족하신다면 신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그러나 천하의 패자가 되고자 하신다면 관중 외에는 인물이 없을 것입니다. 부디 그를 등용하십시오.”

결국 관중은 자신이 죽이려던 자 휘하에서 재상이 되었고, 이후 명재상 관중의 보좌를 받은 소백은 제 환공에 올라 춘추5패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그 후 관중은 사람들에게 말했다.
“일찍이 내가 가난할 때 포숙과 함께 장사를 했는데, 이익을 나눌 때 나는 내 몫을 더 크게 했다. 그러나 포숙은 나를 욕심쟁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내가 가난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내가 사업을 하다가 실패하였으나 포숙은 나를 어리석다고 말하지 않았다. 세상 흐름에 따라 이로울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세 번 벼슬길에 나아갔다가 번번이 쫓겨났으나 포숙은 나를 무능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내가 시대를 만나지 못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싸움터에 나가 세 번 모두 패하고 도망쳤지만 포숙은 나를 겁쟁이라고 비웃지 않았다. 내게 늙으신 어머니가 계심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를 낳은 이는 부모님이지만 나를 알아준 이는 포숙이다(생아자(生我者) 부모(父母), 지아자(知我者) 포숙아야(鮑叔兒也)).”

‘관중’과 ‘포숙아’는 정치의 길로 들어서 본의 아니게 정적이 되는 과정이다.

문소영 서울신문 논설위원은 2015년 7월 9일 [씨줄날줄] 관포지교의 허와 실에서 다음과 같이 결론 아닌 결론을 내렸다

“관중이 재상으로 있는 동안 포숙아는 요직을 맡지 못했다. 관중의 죽음을 앞두고 재상 자리가 비자 소백은 포숙아를 재상으로 올려도 되느냐고 묻는다. 관중의 대답이 걸작이다. ‘포숙아는 흑백이 명확해 정치에 적합하지 않다’고 한다. 관중은 포숙아의 천거를 받아 목숨도 지키고 부귀영화를 누렸으나, 포숙아가 재상이 될 기회를 날려 버린 것이다. 소백을 제나라 통치자로 만들고 친구 관중을 천거할 만큼 안목이 있던 포숙아인데 말이다. 당신이라면 일방적 희생이 필요한 이렇게 이기적인 관계를 우정이라며 감수하고 지킬 것인가.”

제 환공, 관중, 포숙 등 세명다 훌륭하다.
사람보는 눈과, 포용력, 담대함, 감사함 등이 일이관지(一以貫之)한 인물들이다.

정적을 거두어들여 권력까지 내준 제 환공의 도량은 대단하다. 관중을 환공에게 적극 추천한 관중의 절친 포숙아(鮑叔牙)의 공, 제 환공과 포숙의 도움으로 정권을 잡아 자신을 믿고 써준 환공에 보답해 존왕양이, 억강부약(抑强扶弱)의 정책을 편 훌륭한 재상이다.

미흡한 점도 있다.

제 환공의 최후가 그것을 증명한다. 그 시대 군주에게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와 같은 인권과 도덕 의식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제 환공은 정식 부인만 셋을 두었고, 그들 중에서 자식을 얻지 못하자 그와 별도로 후궁을 여섯이나 두었다.

제 환공은 그들 중에서 누구를 후계자로 정할지 흐릿하게 해 후환을 만들었다. 결국 환공이 죽은 다음 제나라는 후계 경쟁으로 날이 지새 환공의 장례조차 제대로 못 치루었다.

공자까지 찬사를 아끼지 않았으며, 고대 중국인들을 이민족의 침입에서 구출하였고, 중원을 호령했던 대단한 영웅 호걸인 이 제 환공의 시신에서는 심지어 구더기까지 들끓었고, 그가 죽은 지 몇 달이 지나, 후계 경쟁이 완전히 마무리 된 다음에야 장사를 치를 수 있었다

인생무상이요 공수래공수거다.

고대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의 말처럼 "이름만 바꾸면 당신 이야기"다.

배울점
(1) ‘관중’과 ‘포숙아’가 한 때 정적이 되었어도 두 사람의 우정은 정세에 흔들리지 않고 변치 않았다. 지금 나의 우정과 인간관계는 이해관계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다.

(2)‘포숙아’는 ‘관중’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혼신을 다 하였다.
나는 친구나 남의 어려움을 구제하는데 내 자신의 어려움처럼 혼신을 다 할 수 있는 의협심이 있는지 살펴 볼 일이다.

(3)‘포숙아’는 ‘관중’이 자신보다 능력이 뛰어남을 인정하여 아낌없이 자신보다 높은 자리에 추천하였다. 그리고 거리낌 없이 자신도 친구인 관중의 부하가 되었다. 나는 나보다 뛰어난 친구나 동료를 높이 평가하기는커녕 시기 질투하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봐야 한다.

(4)‘포숙아’로 인하여 목숨까지 구할 수 있었고 재상까지 된 ‘관중’은 훗날 포숙아에 대해 이렇게 술회하며 ‘포숙아’의 진심어린 우정에 감사해 하였다. “내가 가난하게 살았을 때 포숙아와 장사를 한 적이 있었는데 이익을 나눌 때마다 내가 더 많은 몫을 차지하곤 하였으나 포숙아는 나를 욕심쟁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내가 가난한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일찍이 세 번이나 벼슬길에 나갔다가 세 번 다 군주에게 내 쫓겼지만 포숙아는 나를 모자란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왜냐하면 내가 아직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 번 싸움에 나갔다가 세 번 모두 달아났지만 포숙아는 나를 겁쟁이라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내가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포숙아’는 자기보다 어려운 ‘관중’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기어 양보하고 너그럽게 감싸주었다. 상대의 아픔이나 어려움을 보면 역지사지(易地思之)로서 이해하고 감싸 줄 수 있는 너그러움이 나에게 있는지 살펴볼 일이다.

(5)‘관중’또한 자기가 이룬 공을 모두 ‘포숙아’에게 돌리었다. ‘잘못된 것은 남의 탓이요. 잘된 것은 내 탓이요.’라는 말처럼 남의 공을 자기의 공으로 돌리고 있지는 않는지 되돌아보아야 한다.


후대의 사람들은 관중과 포숙아에 대한 평에서 ‘관중’의 빼어난 능력을 칭송하면서도 그를 끝까지 이해하고 우정을 보여준 ‘포숙아의 인간됨에 대해서 더 높이 칭송하고 있다.

우정은 행동이다.
시는 읊조리고 알면서 행동할 때 반대로 행동하면 더러운 인간이다.
아는 것보다 실천이 중요한 이유다.

손을 뒤집으면 구름이 되고 다시 엎으니 비가 되니 어지럽고
경박한 세상인심 헤아릴 길 없구나.
그대는 보지 못 하였는가 ’관중‘과 ’포숙아‘의 어려웠을 적 사귐을
요즘 사람들은 우정 버리기를 흙 버리듯 하네. (두보 빈교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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