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세종=청주일보】김흥순 = 농촌 계몽운동 소설 상록수의 저자 심훈은 서울 노량진 현 수도국 자리(당시 경기도 시흥군 북면 노량진리)에서 심훈은 1901년 10월 23일 당시 경기도 시흥군 북면 노량진리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대섭(大燮). 본관은 청송(靑松). 호는 해풍(海風). 아명은 삼준 또는 삼보.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조상 숭배 관념이 철저한 아버지 심상정과 어머니 파평 윤씨 사이에서 3남 1년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조선조 말 중류 가정 출신으로 온후한 성품과 뛰어난 재질을 지닌 여인이었다고 전해진다. 심훈의 본명은 대섭이고 소년 시절에는 금강생, 중국 유학 때는 백랑, 1920년 이후에는 훈이라고 썼다.

...1915년 심훈은 경성 제일고보에 입학하였으며, 1917년 3월 왕족인 전주 이씨와 혼인하였다. 제일고보 4학년 재학중(19세)에 3·1만세 운동에 가담했다가 3월 5일 피검되어 7월에 집행유예로 풀려 나왔다. 이어 중국 망명길에 올라 남경과 상해를 거쳐 향주에 이르러 지강대학 국문학과에 입학했다. 여기에서 안석주와 교유하여 후일 '극문회'를 만들기도 했다고 한다.

1942년 이후 동아일보 기자로 활동하였으며, 아내 이해영과 이별하였다. 1930년, 심훈은 19세의 무희인 안정옥과 결혼하여, '독백''그날이 오면등의 시를 발표했다. 그 후 장남 재건과 같이 충남 당진에 내려가 창작에 전념하였다.

1933년 심훈은 장편 '영원의 미소'를 탈고하여 중앙일보에 연재하고, 이해영에 대한 회고적 작품 '직녀성'을 발표하여 그 고료로 부곡리에 자택을 짓고 '필경사'라고 불렀다.

이 필경사에서 심훈은 '상록수'를 쓰고 또 그것이 동아일보현상모집에 당선되어 일약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상록수는 1935년 <동아일보>창간 15주년 현상 모집에 당선되어 상금 500원을 탄 작품으로, 농촌 계몽 운동을 일으킨 큰조카 심재영과 최용신을 모델로 쓰여졌다. 가난한 농촌의 현실을 배경으로 한 그의 작품들은 대개 애향심과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계몽주의 문학의 전형을 이루고 있다.

심훈을 기리는 곳은 충남 당진과 경기 안산 두 곳이 있다.

당진시는 심훈상록문화제를 개최하고 있다. 2012년 올해는 제36회 심훈상록문화제 개막식이 시청 앞 광장에서 14일 오후 7시에 개최됐다. 당진시와 심훈의 인연은 당진군 송악읍 부곡리에는 필경사(筆耕舍)가 있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에게 심훈은 일제시대 농촌계몽소설인 ‘상록수’의 작가 정도로만 알려져 있다. 필경사는 심훈이 서울 생활을 접고 1933년 내려와 부모와 함께 기거하다 1934년에 지은 집이다. 심훈은 이곳에서 대표작인 ‘상록수’를 집필해 1935년 동아일보 문예작품 현상모집에 당선됐다. 그러니까 필경사는 ‘상록수’의 산실인 것이다

경기도 안산은 심훈의 상록수 모델인 최용신이 살던 곳이다. 최용신이 경기도 안산 샘골 (당시는 경기도 화성군 반월면 천곡(泉谷;샘골)으로 온 것은 1931년 10월로 그는 예배당을 빌려 한글ㆍ산술ㆍ재봉ㆍ수예ㆍ가사ㆍ노래공부ㆍ성경공부 같은 것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다. 마을 주민들의 몰이해와 냉대 그리고 질시를 참아 내야 했다. 더 참기 어려운 것은 왜경의 감시와 탄압을 이겨내는 일이었으며 거기에 야학을 운영하기 위한 재정의 어려움도 크나큰 시련이었다.

이를 기념해 안산시는 상록구가 있다. 최용신은 함경남도 덕원(德原) 출신으로 식민지 수탈에 의해 피폐한 농촌사회의 부흥을 위해 농촌계몽운동으로 일생을 바친 독립운동가다.

그가 농촌계몽운동에 몸을 바치기로 결심한 것은 1928년 함남 원산의 루씨여고보(樓氏女高普)를 졸업하고 협성여자신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였다. 이때 그는 "조선의 부흥은 농촌에 있고, 민족의 발전은 농민에 있다."라는 생각에서 농촌계몽운동에 투신하기로 한다.

저작권자 © 청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