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북·세종=청주일보】 김흥순
【충북·세종=청주일보】 오늘 한국이 일본 손으로 넘어간 날이다.

1904년 8월 22일 제1차 한일 협약 체결.
1910년 8월 22일 이완용과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한일 병탄 조약 조인.

우리의 큰길은 민주주의겠고 우리의 최고 이념은 우리 민족의 완전한 해방에 있다. 우리는 자본 제국주의에서 해방되었으나 사람이 사람을 부리고 사람이 사람을 속이며 착취하는 비인도적인 모든 기구가 없어져야 하겠다. -몽양 여운형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가 세워지기까지, 그들은 어떤 국가를 꿈꿨는가?

1945년 8월 15일, 민족은 해방되었으나 온전한 기쁨이 되지는 못하였다. 두 개의 핵폭탄으로 일제의 패망이 앞당겨진 탓에 민족은 스스로 독립을 쟁취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리하여 우리는 분할 점령된 한반도에서 민족의 독립과 민족통일을 완성하고, 일본 제국주의 및 봉건제도의 잔재를 뿌리 뽑아 민주주의 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다시 싸워야만 했다.

'해방 후 3년'은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한 순간부터 1948년 8월 15일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이 수립되는 순간까지의 역사를 다룬 책이다. 여운형, 박헌영, 송진우, 김일성, 이승만, 김구, 김규식ㅡ해방 후 3년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민족 지도자 7인이 완전한 독립과 새로운 국가 수립을 둘러싸고 벌이는 최후의 결전이 담겨 있다.

그들은 모두 민중을 위한 민주주의, 민중을 위한 개혁을 주창했으나 미국과 소련으로 대표되는 세계자본주의와 세계공산주의의 대립이 시작되던 해방 후 3년의 역사에서 서로 다른 길을 선택했다. 이 역사에서 우리의 출발점과 도착점을 확인하고, 그 과정에서 우리가 선택한 것과 선택하지 않은 것을 찾아내고 역사의 가능성을 돌이켜보는 시간이 될 것이다.

안타깝지만 우리는 지금도 세계 강대국의 정책에 흔들리고, 민족통일을 이루지 못했으며, 좌우는 자신의 정책으로 대중을 설득하기보다 자파의 이념을 앞세운 자리싸움에 한창이다.

이런 와중에 독단적 정치와 신자유주의의 폐해, 아직도 버리지 못한 친일 잔재와 식민사관으로 정치적·경제적·사회적 민주주의는 시간이 갈수록 급속히 추락하고 있다. 그런데 만약 해방 후 3년 동안 우리 민족이 하나로 뭉쳐 미

·소의 합의를 종용했다면 미국과 소련은 자신들의 의견을 그토록 고집할 수만 있었을까?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의 지도자나 대중은 다시 한 번 ‘우리가 바꿀 수 있는 역사’를 꿈꾸고 실행해야 한다. “완전독립, 민족통일, 민주주의 신한국을 건설하라!” 지금도 우리에겐 ‘모두를 위한 신한국’이 필요하다.

미·소 냉전의 세계 질서와 끊임없이 충돌하며 완전독립, 민족통일, 민주주의의 신한국을 건설하고자 했던 해방 후 3년. 해방은 우리에게 많은 꿈과 가능성을 가져다줬고, 비로소 우리 민족은 민주주의의 역사, 자유와 평등의 역사를 시작할 수 있었다.

'해방 후 3년'은 그 ‘가능성의 역사’에서 우리가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는지, 해방 후 3년 동안 민족 지도자 7인이 꾸었던 꿈에서 오늘날 이어받아야 할 정신은 무엇인지 들려준다.

저자는 한국 근대사를 주로 연구해 온 민족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이다. 그가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은 순간부터 1948년 8월 15일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이 수립되기까지의 역사를 추적한 책이다.
여운형, 박헌영, 송진우, 김일성, 이승만, 김구, 김규식. 해방 후 3년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이 7인의

민족 지도자는 어떤 국가를 꿈꿨을까?

그들은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가 만들어지기까지 각자가 꿈꾸는 신국가를 만들기 위해 뜨겁게 뭉치고 격렬히 싸웠다. 그들은 모두 민중을 위한 민주주의, 민중을 위한 개혁을 주창했다.

그들이 만들고자 한 정치적·경제적·사회적 민주주의는 어떤 모습이었고, 그들 각자에게 ‘민족’은 어떤 의미였을까?

그들은 왜 정당통일운동, 좌우합작운동, 신탁통치반대운동 등을 펼치거나 반대했으며 그 결과는 민족통일운동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당시 조선신민당 지도자 백남운의 말을 빌리면 해방 후 우리 민족은 ‘민족국가 수립’과 ‘사회혁명 완수’라는 이중의 과제를 동시에 수행해야 했고, 이를 위해서는 좌우가 함께하는 좌우연립정부를 수립해야 했다.

하지만 미국과 소련으로 대표되는 세계자본주의와 세계공산주의의 대립이 시작되던 해방 후 3년의 역사에서 민족 지도자 7인은 서로 다른 길을 선택했다. 남북 좌우가 대동단결하는 민족통일국가, 임정법통론에 입각한 완전평등의 신민주국가, 혁명으로 만든 인민민주주의 국가, 서구 자유민주주의 국가 그들을 움직인 것은 ‘민족’, ‘혁명’, ‘권력’이었다.

한일병탄(한일합병)
일본과 미국의 짜고치는 고스톱에 당한 대한국

제1차한일협약,가쓰라-태프트밀약,포츠머스조약,을사늑약에서 일본뒤에서 미국의 후원과 지시 사항들
한일병탄이 되는 과정에서 고종황제가 조선의 자주 독립정신을 배가하기 위하여 건국하신 대한국의 물리적 힘이 약했고, 송병준, 이용구가 일제 돈을 쳐먹고 운영한 일진회와 같은 민족 배반 세력의 움직임도 큰 기여를 하였지만,사실상 우리 대한국을 먹겠다는 외래 세력이 있었기 때문에 한일병탄(한일병합)이 성립된 것이다.

그 외세 세력은 바로 일본과 미국이었다.
일본뒤에 미국의 적극적인 가담과 후원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어찌 보면 거의 지시에 가까웠다. 즉 이것을 한국을 지배하라는 미국의 계획을 일본이 실행한 것에 가깝다.

실증적 예를 들면, 병탄 6년 전인 1904년 8월에 있었던 제1차 한일협약으로 일제의 고문정치가 시작되었던 바, 대한국의 재정고문에 일본인 메카다 다네타로가, 외교고문에 미국인 스티븐스가 자리를 차지했다.

미국인 외교고문 스티븐스는 전세계 언론을 대상으로 '한국은 일본의 축복속에 발전한다'는 둥 지금 일본이 하는 망언을 뒷받침하는 그러한 기자회견을 지속적으로 했다.

장인환, 전명운 의사가 처단을 하기는 했지만,이것은 미국 정부의 후원과 지시가 없었다면 이러한 처사가 일어날수 없는 것이다.

제1차 한일협약 체결을 하고 약 1년이 지난 시점인 1905년 7월 29일 가쓰라 태프트 밀약이 만들어졌다. 이 밀약은 말그대로 비밀협약으로 1924년 미국 존스홉킨스대학의 데넷 교수가 루즈벨트 대통령의 서한집에서 발견함으로써 세상에 공개된 것이다.

밀약의 내용,
미국은 일본의 한국 지배를 승인하고, 일본은 미국 지배하의 필리핀을 건드리지 않겠다는 상호 양해 각서다.
필리핀은 미국땅, 한국은 일본땅이니 서로 도둑질한 땅 건드리지 마라는 강대국 간의 국가적 이익 보호 카르텔의 전형적인 본보기다.

이것도 모르고 한국의 많은 독립 운동가들은 미국으로 건너가 민족의 독립을 위한 외교 활동을 한다고 했으니 정말 애석하기 그지 없다.

1905년 9월 5일 미국이 러일 전쟁을 중재하며 체결된 포츠머스 조약

러시아와 일본이 전쟁을 하고 일본이 대승을 거두지만, 전쟁도도 끝나기전 미국의 중재로 일본은 미국까지 들어가 러시아와 조약을 체결한다.이 포츠머스 조약은 100년 전 뤼순감옥에서 장렬히 서거하신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에서도 호되게 질책 받았던 조약이다.

포츠머스 조약에도 한국의 지배권을 일본이 갖는 것을 러시아가 인정한다는 내용이 들어가게 된다. 대한국은 세계 평화를 위하여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는 논리가 성립되는 아주 어이없는 조약이 포츠머스 조약이다.

포츠머스 조약을 주도한 시어도어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은 노벨평화상까지 거머쥐게 된다.이렇게 제1차 한일협약의 외교고문 스티븐스의 활약, 가쓰라-태프트 밀약, 포츠머스 조약의 미일 공조는 정말로 환상의 호흡이었다.
미국의 환상적인 어시스트에 이어 일본이 만든 해트트릭이다.

거기에 마지막 피날레가 을사늑약(1905년11월17일)이다.
미국과 일본이 만든 화려한 공조 플레이는 정말 상상을 초월할 정도까지 대단했다.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사실상 대한국을 식민지화하고 지배하기 위하여 강압적으로 체결한 조약인 을사늑약을 제일 먼저 지지하고 주한 미국 공사관(대사관)을 영사관으로 격을 낮추어 을사조약의 정당성에 반심반의했던 다른 나라들의 찬성과 동참을 이끌어 냈던 것이다.

어찌 한 나라가 자발적으로 외교권을 다른 나라에 넘겨줄 수 있었겠는가 그것을 다른 나라 대사관들이 믿지 못하자 미국 대사관에서 제일 먼저 움직인 것이다. 그리고 국제적인 호응을 창출한 것이다.

이것이 짜고 치는 고스톱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리하여 대한국은 일본과 미국의 짜고 치는 고스톱판에서 식민지가 되었고, 그것이 신탁통치로 이어져 남북한이 갈라진채 친소 정부, 친미 정부가 들어서고, 6 .25전쟁이 일어나고 유엔국이 참전하여 신나게 우리 한민족이 살고 있는 한반도에 폭탄을 퍼부었다.

공산체제와 자본주의체제가 극한의 대립을 하며 한민족을 갈기 갈기 찟은 상태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도 밀약이 존재하는지 그들의 이익에 우리 내부의 매국노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알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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