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세종=청주일보】김흥순 = 반기문(潘基文, Ban, Ki-Moon)

일제강점기
1944년 6월 13일에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상당리에서 태어났다.
조선 중종 때 형조판서를 역임한 반석평(潘碩枰)의 후손

대한민국 외교관
1970년 외무부 여권과
1972년 주 인도대사관 부영사,
1974년 주 인도대사관 2등 서기관 등,
주로 국제 조직을 거쳐 1980년 외무부 국제조직조약국 과장.
외무부 지원으로 하버드 케네디 행정대학원으로 유학,
1985년 4월에 졸업하여 석사학위 취득.
1985년 노신영 주 인도 대사에 의해 총리 의전비서관 발탁
1987년 7월 주미대사관 총영사,
1990년 6월 외무부 미주국장,
1992년 2월 외무부장관 특별보좌관,
1992년 9월 주미 공사 역임

◆역대 정권 .

▲김영삼 정부
1996년 11월,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임명장 수여식에서의 김영삼 대통령과 반기문
반기문은 1994년 제1차 북한 핵위기 때 주미 대사관 정무공사로 재직하면서 한국과 미국 사이의 대북정책을 조율하는 실무총책을 맡았으며 그해 10월 북미 제네바 기본합의 체결과정에 기여했다.

1995년 2월 외무부 외교정책실장과 외무부 차관보를 지내고, 1996년 11월에는 외교안보수석을 맡았다. 1997년 2월 황장엽 전 조선로동당 비서가 베이징 한국 총영사관에 망명 신청을 했을 때, 중국 정부의 입장을 고려해 제 3국인 필리핀을 경유하여 한국으로 망명할 수 있도록 필리핀 피델 라모스 대통령에게 김영삼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하고 황장엽의 한국행을 위한 담판을 지은 밀사로서 활약하였다.

▲김대중 정부

반기문은 2000년 1월 외교통상부 차관을 지내다가 2001년에 물러났다. 뒤이어 2001년 9월 제56차 유엔총회의장 비서실장, 2002년 외교통상부 유엔본부 대사를 맡았다.

그 와중에 9·11 테러가 발생하자, 그와 관련된 유엔 차원의 테러리즘 대응조치 및 이견 조율 업무를 수행하는 등 국제경험을 쌓았다.

▲노무현 정부
반기문은 참여정부에서 외교안보보좌관을 지냈다. 2003년 2월 11일 미국의 신용평가기관인 무디스가 "북한행동 및 국제사회의 대응과 관련한 불확실성"을 문제 삼아 대한민국의 국가신용등급 전망을 '긍정적'에서 '부정적'으로 낮추며 정부를 압박했다.

반기문의 인터뷰에 따르면 미국 부시 행정부 당시 노무현이 "반미"적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2003년 3월 9일 참여정부는 반기문을 비롯한 3인의 대표단을 무디스, 피치,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 등의 신용평가기관에 보냈다.

반기문은 인터뷰에서 3인의 대표단은 뉴욕의 무디스와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 본사와 홍콩의 피치 사무국을 방문해 한국의 신용등급을 내리지 말아달라고 읍소하여 시간을 벌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후 무디스는 신용등급 전망만 낮춘 채 실질적인 신용등급 하향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

▲참여정부와의 대북정책 대립
보수적인 대북관을 가지고 있던 반기문은 대북 유화정책을 추구하던 노무현 당시 대통령 및 참여정부 각료들과 잦은 마찰을 빚었다.

2004년 7월 반기문은 국가안전보장회의(NSC)의 결정을 무시하고 베트남에 모여있던 400여명의 탈북자들을 공개적으로 일거에 한국으로 입국시켜 대북관계를 경색시키고 대통령과 대립하였다.

2005년 3월 미국이 기존의 정전협정 체제를 평화협정 체제로 바꾸자는 북한의 주장을 심도있게 검토하고 이를 대한민국 측에 제안했으나, 반기문은 이를 유엔사를 해체하고 주한미군을 철수시키려는 북한의 기만전술이라고 판단하여 노무현에게 보고조차 하지 않았고, 나중에 콘돌리자 라이스 당시 미 국무장관에게 이 사실을 확인한 노무현은 반기문을 크게 질책하였다.

반기문은 이후에도 북한 주장에 동조하는 청와대의 한반도 평화협정 체제 구상에 계속 집요하게 반대하였다.

반기문은 2005년 8월 미국 워싱턴을 방문하여 '선 6자회담, 후 평화협정' 방침을 강조하는 발언을 하였고, 이 때문에 정동영 당시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장으로부터 그런 냉전적 시각으로 외교를 제대로 하겠냐는 질책을 듣기도 하였다.

청와대는 이같이 대북문제에 강경한 반기문을 견제하기 위해, 2005년 9월 6자회담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모든 핵무기를 파기하고 NPT와 IAEA로 복귀한다는 9.19 공동성명이 타결될 때, 외교부에 박선원 당시 행정관을 감시병으로 파견하기도 하였다.

이후 2006년 7월 북한 대포동 2호를 발사하고, 같은 해 10월 1차 핵실험을 감행하여, 9.19 공동성명은 공식적으로 파기되었다.

▲유엔 사무총장
첫번째 임기 (2007–2011)
두번째 임기 (2012–2016)
학력
충주교현초등학교 졸업
충주중학교 졸업
충주고등학교 졸업
~ 1970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외교학과 학사
~ 1985년 하버드 대학교 케네디행정대학원 행정학과 석사
~ 2008년 페어리디킨슨대학교 명예박사
~ 2010년 모스크바국립국제관계대학교 명예박사
~ 2010년 난징대학교 명예박사
~ 2015년 이화여자대학교 여성학 명예박사
~ 2016년 케임브리지대학교 법학 명예박사
~ 2016년 로욜라메리마운트대학교 명예박사

▲경력
1970년 제3회 외무고시 합격
1976년 주인도 대사관 1등 서기관
1980년 외무부 국제연합과 과장
1985년 국무총리비서실 의전비서관
1987년 주미국 대사관 참사관 겸 총영사
1990년 외무부 미주국 국장
1992년 외무부 장관특별보좌관
1995년 외무부 외교정책실 실장
1996년 외무부 제1차관보
1996년 대통령비서실 의전 수석비서관
1996년 대통령비서실 외교안보 수석비서관
1998년 주오스트리아 대사관 대사 겸 주비엔나 국제기구대표부 대사
2000년 ~ 2001년 외교통상부 차관
2001년 ~ 2003년 제56차 UN총회 의장비서실 실장
2002년 외교부 본부대사
2003년 ~ 2004년 대통령비서실 외교보좌관
2004년 ~ 2006년 외교통상부 장관
2007년 ~ 2016년 제8대 UN 사무총장

▲논란
1. 천안함 침몰 사건 강경 반응
2. 정파 논란
3. 미국 유학 시절 김대중 동향 보고
4. 신천지예수교 증거장막성전 관련 논란

▲긍정적 평가
2011년 6월 반기문의 유엔 사무총장 연임이 유력시되자, 영국의 'BBC'는 반기문이 외교관들 사이에서 근면성실하고 진지한 지도자로 명망을 얻고 있다면서, 합의와 조화를 이끌어내는 능력이 뛰어난 인물로 평가하였다.

2016년 9월 영국의 '데일리 텔레그래프'는 반기문의 유엔 사무총장 임기 동안 극빈층 비율과 영아 사망률이 크게 낮아졌고, 여아 교육 비율이 최고 수준을 경신했으며, 주요 분쟁에서 세계대전의 위험을 피할 수 있었다며 반기문 10년의 성공적 측면을 언급하였다.[54] 또한 반기문이 이끌어낸 파리 기후 협정은 세계 온실가스 감축의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고 강조하였다.

2016년 11월 미국의 경제 전문지 '포브스'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강하고 인간적인 지도자”라며, 한국의 대통령이 되기에 적합한 리더십을 갖춘 인물이라고 보도했다. 국제 외교안보 전문가 앤더스 코(Anders Corr)는 ‘적합한 리더로서의 반기문(Ban Ki-moon: Fit To Lead)’이란 기고 글에서 반기문 총장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비판한 사실을 언급하며 “그가 강인한 외교를 펼쳤다”고 밝혔다.

▲부정적 평가
2009년 6월 보수 언론인 제이콥 하일브룬(Jacob Heilbrunn)은 미국의 외교 전문지 《포린 폴리시》에 낸 기고문에서 반기문은 "아프가니스탄 재건, 핵확산, 난민 문제 등의 해결에 개입하지 않음으로서 유엔을 무의미한 조직으로 만들었다"라고 비판했다.
2009년 6월 영국의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반기문의 중간 업무 평가에서 10점 만점 기준으로 주요 강대국에 맞서는 진실성에 3점, 큰 그림을 그리는 데 8점, 평화 유지 임무에 6점, 관리·조정 능력에 2점을 주어 반기문의 업무 수행을 다소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반기문을 다룬 도서
'반기문, 나는 일하는 사무총장입니다'
'반기문과의 대화'
'바보처럼 공부하고 천재처럼 꿈꿔라'
'세계를 가슴에 품어라'

▲가족
부인 유순택 1971년 결혼. 아들 반우현과 딸 반선용, 반현희 -유엔아동기금(UNICEF) 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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