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세종=청주일보】김흥순 = 문헌을 보면 고대는 돈으로 벼슬을 산 기록이 있다.

한(漢)나라 환제가 후궁 5천~6천명이나 되는 여자를 두고 색정에 눈을 밝혔으나 아들 하나 남기지 못하고 30대에 요절해 한낱 정후의 가문에서 태어나 열두 살까지 몇 백호에서 나오는 세금을 받아 살아 온 유굉이라는 인물이 급작스레 황제 자리에 올랐는데 이 사람이 바로 영제다.

영제의 짧은 일생에서 가장 알려진 일은 벼슬장사다.
봉건사회에서 돈 많은 사람들이 돈으로 벼슬을 사도록 허락하는 것은 조정에서 재정난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벼슬마다 값을 정해 놓고는 “벼슬을 너무 싸게 팔았다”고 후회한 일화를 남긴 영제의 가장 기발할 점은 외상으로 벼슬을 팔았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정위(廷尉: 법무부 장관격) 최열이 500만 전을 바쳐 사도 벼슬을 샀는데 영제가 “1천만 전을 받을 수 있었는데”하고 후회한 뒤로는 값이 자꾸만 올라가 큰 군의 태수가 되려면 2천만 전을 써야 했다.

조조의 아버지 조숭은 1억 전을 내고 태위라는 높은 벼슬을 샀으니 그에게는 돈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영제는 돈이 없는 사람이 외상으로 벼슬을 할 수 있으나 벼슬을 한 다음에는 현금을 내는 것보다 두배를 바쳐야 한다고 규정했다.

신임 관원이나 자리를 옮기는 관원들은 반드시 궁궐을 보수할 돈을 바쳐야 부임할 수 있었다. 거록군 태수로 임명된 군졸 사마직은 “깨끗한 명성을 누렸으니 300만 전을 깎아준다”는 특혜를 받았다.

사마직은 “백성의 어버이로서 차마 백성을 착취할 수 없다”는 표문을 올리고 약을 먹고 자살했다. 사마직이 올린 글을 받은 영제는 그일 때문에 잠시 궁궐 보수금을 받아내지 않았으나 후한의 사회는 이미 썩은 뒤였다.

벼슬을 살 수 있는 금액을 보면 삼공의 하나인 사도 벼슬은 동전 500만 전인데 삼공(三公)은 한나라의 최고급 관원이다. 삼공에는 태부, 태, 태가 있는데 실권은 없으나 지위가 매우 높다. 녹봉은 월 350석을 받는다.

시랑ㆍ시중 시중상서ㆍ시중소부는 동전 500만 전, 어사대부는 동전 600만 전이며 무관벼슬인 경우 독장(督將: 군사를 거느리는 장수)는 400만 전 무군대장군(고급 무관)은 500만 전, 무군장군 보다 지위가 낮은 벼슬인 무군중랑장은 400만 전이면 살 수 있다.

돈으로 벼슬을 사도록 허락하지는 않았지만 조선 영조시대에 돈으로 벼슬을 사기도 했다. 영조 때 한양의 남산골에 사는 가난한 선비 장경문은 당쟁으로 몰락한 정승의 후손으로 낡은 집 한 채에 의지해 죽지 못해 간신히 연명해 가고 있었다.

어느날 임금은 민생을 살피고자 암행길에 나섰다가 장경문을 제주 목사의 관직을 내렸다.

이때 새우젓 최대 집산지인 한양의 마포 서강가에 사는 배서방은 그의 아버지가 새우젓 장사로 전답을 꽤 모아 가세는 넉넉했지만 사람이 워낙 변변치 못한 얼간이 인데다 건달 기질까지 있어 날마다 술과 기생에 빠져 세월을 보내고 있는데 돈 천냥쯤 쓰면 비장 벼슬을 할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마음이 솔깃했다.

천냥이라면 새우젓 천 독을 팔아야 벌 수 있는 금액이지만 상놈이 벼슬자리를 얻자면 뇌물을 쓰는 방법 밖에는 없다고 생각하고 면접시험을 보는 날 젊은이들과 함께 줄을 섰다가 한 사람이 사랑방 댓돌 밑으로 나가면 장경문은 긴 장죽으로 손짓을 하며 인물을 심사하는 것이었다.

장경문은 배서방에게 종이 쪽지를 하나 보여줬다. 종이에는 이방 900냥, 호방 800냥, 예방 700냥, 공방 600냥, 그리고 행을 바꿔 형방 800냥, 등이 쓰여져 있었다. 배서방이 훑어보니 다른 자리엔 각각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는데 이미 팔렸다는 표시고 예방과 형방만이 빈자리였다.

100냥을 더 쓰면 육방의 우두머리 이방을 차지할 수 있는데 팔려 나갔다고 하니 배비장은 800냥을 주고 형방을 사서 비장 벼슬을 얻었다. 역사에 나오는 배비장이 바로 그 인물이다.

계급 매관제도, 즉 돈을 주고 계급을 사던 제도의 기원은 각 지역의 영주가 사설 군대를 보유하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보유가 가능한 사설 군대의 규모는 각 영주의 재력과 관계있었기 때문에 각 계급에 맞는 가격을 징수해 군대 운영에 보탠 것이다.

이 제도가 아예 정식으로 법제화된 것은 영국 국왕 찰스 2세(Charles II, 1630~1685)의 재위 기간 중이었던 1683년이다.

사실 돈을 주고 계급을 산다고 하면 부정부패의 산물 같은 느낌이 들지만, 이 제도는 이전까지 영주에게만 충성하던 군대를 왕실이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였음과 동시에 직업 군인의 생계 보장을 위한 제도적 장치로 활용됐다.

“매관제” 효과

♦귀족의 특권을 보호하기 위한 장벽= 통상적으로 고위 계급일수록 가격이 비쌌기 때문에 결국 이 가격을 감당할 수 있는 귀족들이 군 지도층을 형성할 수 있는 일종의 울타리 역할을 했다.

♦권력의 남용, 직무상의 중과실, 혹은 무능에 대한 담보= 만약 직무 수행 중 권력을 남용하거나 중과실을 저지른 경우에는 임관을 취소하고 왕실에서는 계급에 걸려있는 담보액을 상환해주지 않았다.

♦횡령이나 부패를 막기 위한 안전장치= 금전적으로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 이들이 군의 요직을 맡도록 함으로써 군수물자를 빼돌리거나 병사들을 개인 부역 등에 동원해 재산을 축재하지 않도록 했다.

♦전역 군인의 노후 보장= 고위직까지 진출한 장교들이 전역할 경우, 자신의 계급으로 새로 진급한 후임자로부터 계급에 걸린 돈을 받게 함으로써 생활의 안정을 보장해 준다. 연금제도가 없던 시절에는 전역군인이 목돈을 받을 수 있게 하는 유용한 수단이었다.

♦군이 사회변혁을 꾀하지 않게 하는 장치= 이 제도가 계속 유지되어야 본인이 전역할 때 계급에 상응하는 돈을 받을 수 있으므로, 군이 사회제도의 변화나 변혁을 지향하지 않도록 통제한다.

저작권자 © 청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