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세종=청주일보】김흥순 = 圍魏救趙 共敵不如分敵, 敵陽不如敵陰.
조나라를 구하기 위해 위나라를 포위한다는 뜻으로 적의 예봉을 피해 급소를 찌름으로써 작전을 무력화시키는 계책이다. 병력이 집중해 있는 강적을 공격하는 것은 적의 병력을 분산시켜 대적하느니만 못하다. 적과 정면으로 맞서는 것은 측면으로 치고 들어가 적의 취약한 부분을 공략하느니만 못하다.

고대 36계 병법 중 두 번째인 ‘위나라를 포위해 조나라를 구하는(圍魏救趙·위위구조)’ 책략은 “모여있는 적보다 흩어진 적이 유리하고, 적의 강점보다 숨은 약점을 공격해야 한다”는 지침에 따라 강한 적을 분산시키는 전법이다.

‘圍’는 수단이며 ‘救’는 목적이다.


집권에 성공한 더불어민주당이 대선 후 ‘협치’라는 키워드를 내세워 국민의당을 본격적으로 흔들고 있다. 국민의당이 대선 패배 후 내부부터 무너지기 시작하자 세력 흡수를 위한 사전 정지작업에 나선 것이다.

국민의당 흔들기의 총대는 문재인 대통령의 후보 시절 캠프 총괄본부장을 맡았던 송영길 의원이 멨다. 송 의원은 BBS라디오와의 인터뷰에서 “선거 전부터 나는 일관되게 국민의당과 협력을 주장했다. 국민의당은 뿌리가 같은 당이고, 협력해서 개혁을 함께 추진하는 게 지지자들의 의견과 일치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전날 오마이TV 개표방송 인터뷰에서도 “안철수 없는 국민의당과는 연정할 수 있다”고 발언한 바 있다. 민주당 복귀를 고려하는 일부 국민의당 의원들에게 연정이나 협력 같은 단어로 긍정적 신호를 보낸 셈이다.

민주당 통합정부추진위원장을 맡고 있는 박영선 의원은 국민의당도 문재인 정부 내각에 포함될 수 있다고 흘리면서 국민의당 인사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고 있다.

박 의원은 이날 YTN 라디오에 출연해 “문 대통령이 ‘다른 정당의 당적을 갖고 있더라도 그 당적을 보유한 채 함께 일하겠다’고 말했다.

국민의당과 합당 이야기를 지금 하는 것은 서두를 일은 아니라고 본다. 국민의당과 민주당은 형제 당으로서의 우애를 얼마만큼 잘 지켜나가느냐, 이것이 호남 분들이 바라는 것”이라고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

급하게 당 대 당 통합을 추진하는 것보다, 문재인 정부 내각에 국민의당의 지분을 배정하는 방식으로 국민의당을 민주당의 정치적 영향력 안에 두는 것이 우선이라는 취지다.

지도부 총사퇴로 사실상 당 기능이 정지된 국민의당은 민주당의 연이은 러브콜에 대해 특별한 반박 입장을 내놓지 못했다.

기원전 4세기 중국은 춘추시대(BC 770∼476)에 이어 전국시대(BC 475∼221)로 한·조·위·제·초·연 사이에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여러 나라가 황하 유역을 벗어나 중원의 넓은 영토로 뻗어 나가는 시대였다.

위는 황하 이남[수도는 대량, 오늘날 허난성 카이펑(開封)], 조는 황하 북쪽[수도는 오늘날 허베이성 한단(邯鄲)], 제는 산둥반도 일대[수도는 오늘날 산둥성 쯔보(淄博)]에 위치했다.

기원전 353년 위나라가 조나라를 치니 조나라는 제나라에 원조를 요청했다. 조나라 수도 한단은 여러 나라 상인들의 왕래가 잦았고 무슨 물건이든 자유롭게 거래하던 가장 큰 상업도시였다.

제나라는 조나라에 직접 군사를 보내지 않았다. 오히려 위나라 수도 대량을 공격해 계릉(桂陵)전투에서 승리하자 위나라는 조나라에서 철수했다. 제나라군이 대량을 공격한 책략은 조공으로 적을 유인해 위군 주력을 계릉에서 섬멸할 의도였다. 『Hide a Dagger Behind a Smile』에서는 위위구조가 아니라 위위구한의 사례를 들었다.

계릉전투 12년 뒤(기원전 341년) 위나라와 조나라가 한나라로 쳐들어갔다. 한나라는 급한 사정을 제나라에 알렸고 제나라는 전기를 장수로 삼아 위나라 수도 대량을 향했다.

전기의 군사자문관 손빈은 손자병법 시계편의 ‘용병은 기만술(詭道·궤도)이며, 할 수 있지만 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게 해야 한다(能而示之不能 用而示之不用)’와 병세편 ‘적을 움직이게 하여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以利動之 以卒待之)’는 전술을 적용했다.

위나라 방연은 제나라군을 밤낮 없이 추격했다. 손빈은 마릉 협곡 입구에 1만 명을 매복시켰다. 마릉은 조나라와 위나라 중간지점에 있는 곳으로 진입은 용이하나 진출은 어려운 사지(死地)였다. 한 번 걸려들면 살아남기 힘든 지역이었다. 손빈은 큰 나무를 하얗게 깎아 ‘방연은 이 나무 밑에서 죽는다(龐涓死夭此樹之下·방연사요차수지하)’고 적었다.

방연이 밤에 나무 밑에 도착해 이 글을 보려고 부싯돌로 불을 밝히자 제나라 사수들이 일제히 활을 당겼다. 손빈은 마릉에 매복해 있다가, 동문수학한 의형제였으나 중상모략으로 그의 다리를 불구로 만든 철천지원수 방연의 군대를 한 번 싸움으로 섬멸했다. 방연은 자신이 속은 것을 알고 자결했고 손빈의 명성은 천하에 알려졌다.

훗날 역사는 반복됐다. 기원전 231년 진시황이 죽고 초나라 항우와 한나라 유방이 자웅을 겨룰 때였다. 유방의 참모 장량은 개미가 단 것을 좋아하는 습성을 이용해 ‘항우가 오강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다(項羽烏江自刎)’라는 글귀를 바위에 만들었다. 전투에서 대패하고 오강을 건너려던 항우 역시 이 글을 보고 자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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