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세종=청주일보】김흥순 = 5.18 민주화운동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될 인물이 김재규다. 김재규(金載圭)는 1926년 3월 6일 태어나 1980년 5월 24일 처형된 사람이다.

대한민국 군인, 정치가, 행정관료, 정무직공무원으로 유신정우회 국회의원, 건설부 장관, 중앙정보부장을 지냈다. 본관은 김녕(金寧)이고 경상북도 선산 출생이며 호는 덕산(德山)이다.

박정희의 암살 동기에 대해서 거사설, 의거설과 박정희의 핵개발을 막기 위한 미국의 사주설, 정신이상설과 차지철과의 비교에 대한 분노설 등이 있으나 자세한 암살 동기는 불확실하다. 그는 신군부 집권 직후 1980년 5월 24일 전격 사형 집행되었다.

폭압성을 더해가던 군사독재는 1979년 10월 16일 ‘부·마 민주항쟁’을 계기로 난관에 부딪쳤다. 결국 그로부터 열흘 뒤인 10월 26일, 박정희는 부하였던 김재규의 총에 의해 죽게 된다. 군사독재에 신음하던 국민들은 박정희의 사망을 한국 민주주의의 새로운 여명으로 받아들였다.

알다시피 민주주의의 여명을 짓밟은 ‘12ㆍ12 군사정변’과 ‘5ㆍ17’ 계엄 확대는 김재규의 박정희 저격으로 부터 시작됐다. 신군부가 국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12ㆍ12 군사정변’이고,이에 반하여 재야인사와 주요 야당의원은 ‘계엄해제와 민주화 이행’을 주장했고, 전국의 수많은 대학생은 학원의 자율화와 민주화를 요구했다.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사회 전반에 걸쳐 분출되던 ‘80년의 봄’이었다. 1980년 5월 10일, 23개 대학 대표로 구성된 전국 총학생 회장단은 ‘비상계엄의 즉각 해제, 전두환ㆍ신현확 등 유신잔당의 퇴진’ 등을 담은 결의문을 포고하였고, 거리시위를 계획했다.

이런 시위의 조짐을 감지한 전두환 중앙정보부장은 북한이 남한을 침략할 조짐을 보인다는 이유로, 비상경계태세 돌입 명령을 내렸고,

국민의 기대와 요구를 저버린 신군부의 ‘계엄령 확대’는 많은 이들이 시위에 가담하게 만들었다.

신군부는 재야 정치인과 민주화운동 관련자를 시위의 중심세력이라 여겨 연금하고 구금했다. 또 국회를 비롯한 정부기관, 대학, 각종 언론사와 방송사 등에 계엄군을 주둔시켰다. 이때, 전북대학교에 주둔한 계엄군에 의해 이세종 학생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5월 18일 계엄군은 전남대학교 정문 앞에서 등교를 하는 학생들을 막아 세웠다. 이에 학생들이 거세게 항의하자 계엄군은 진압봉을 앞세워 학생들을 구타하고 연행하기 시작했다.

이를 만류하려던 시민까지도 폭행을 당했다. 등교하지 못한 학생들은 이런 계엄군의 폭력을 알리기 위해 전남도청으로 진출했다. 소식을 전해 듣게 된 사람들도 하나둘, 도청으로 몰려들었다. 이때만 해도 시민은 소극적이었고, 조직화되지 않았다.

이후 계엄군은 조금이라도 사람이 모이면 해산하라는 위협과 폭력을 가했다. 계엄군의 진압봉은 경찰의 진압봉과는 다른 형태로, 구타를 당한 시민은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계엄군의 잔인함에 분노한 시민이 계엄군의 의도와는 달리 거세지고 집단화되자, 계엄사령부는 광주지역의 통행금지 시간을 저녁 7시로 조정했다.

이러 일련의 일이 김재규가 박정희를 저격한후 일어난 일들이다.

김재규
박정희의 동향(경상북도 구미) 후배이자 육사 2기로 박정희와 동기다. 1943년 안동농림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해군 비행 예과 연습생에 선발되어 전투기 조종훈련을 받고 소위 임관을 앞둔 와중에 해방을 맞았다.

해방 후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1] 제2기생으로 입교하여 1946년 12월 졸업하였다. 그러나 재직 중 부대 내 사망사고의 책임을 지고 면직되어 잠시 김천중학교와 대륜중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하다가 복직하였다. 1952년에 육군대학교를 졸업하고 1970년 한양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1954년 육군 제5사단 36연대장을 거쳐 육군 제101연대장을 지냈고, 1956년 육군 준장 진급, 1957년 육군대학교 부총장을 지냈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직후 반혁명 세력으로 몰려 일시 감금되었으나 박정희의 명령으로 풀려나 군사정부에 적극 협조했다.
이후 군사정권 치하에서 1961년 호남비료 사장, 1963년 육군 제6사단장, 1966년 육군 제6관구사령관, 1968년 육군 보안사령관, 1971년 육군 제3군단장을 역임하고 1973년 육군 중장으로 예편하였다.

육군 제6사단장 시절이던 1964년, 6.3사태 당시 계엄군을 지휘하여 박정희에게 더 큰 신임을 받게 된다.1973년 유신정우회(維新政友會) 소속의 9대 국회의원이 되어 정치계에 입문하게 되었다. 그 해에 중앙정보부 차장으로 임명되었고, 1974년에는 건설부장관에 임명되었다.

1976년 12월 중앙정보부장 자리를 맡으면서 의원직을 사퇴하였다.

이후 빈번한 소요사태 발생과 긴급조치령의 남발에 따른 정치세력간의 알력과 갈등이 첨예하게 전개되던 상황 속에서, 그는 주도면밀한 정보수집과 사태무마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1979년 8월 11일 YH 무역 여공 농성 사건(YH貿易 女工 籠城 事件), 10월 4일 신민당 총재 김영삼(金泳三)의 국회의원 제명 사건, 10월 16일 부마사태 등 계속된 정국불안사건을 수습하면서, 유신정권의 정당성에 대한 의문과 회의를 느끼기 시작하였다.

동시에 시국 수습책을 둘러싸고 강경파인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車智徹) 과 심각한 마찰을 빚고, 차지철과 그를 옹호하는 박정희에 대한 반감과 불신을 가지게 되었다. 이 와중에 주프랑스 공사 이상열(李相悅, 1929년 11월 13일 ~ 2006년 4월 3일)을 매수하여 1979년 10월 7일 전(前) 중앙정보부장 김형욱(金炯旭)을 유인 살해하도록 유도한다.

1979년 10월 26일, 서울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전가옥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김계원 대통령 비서실장 및 차지철 대통령 경호실장과의 연회 술자리 도중,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을 발터 PPK 권총으로 사살, 10.26 사태를 일으키고 체포되어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

이후 1980년 1월 28일 육군 고등계엄군법회의에서 내란목적살인 및 내란미수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그 해 5월 24일 서울구치소에서 사형 집행되었다.

김재규는 1심 최후변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의 10월 26일 혁명의 목적을 말씀드리자면 다섯 가지입니다. 첫번째가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요, 두번째는 이 나라 국민들의 보다 많은 희생을 막는 것입니다. 또 세번째는 우리 나라를 적화로부터 방지하는 것입니다.

네번째는 혈맹의 우방인 미국과의 관계가 건국이래 가장 나쁜 상태이므로 이 관계를 완전히 회복해서 돈독한 관계를 가지고 국방을 위시해서 외교 경제까지 보다 적극적인 협력을 통해서 국익을 도모하자는 데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다섯번째로 국제적으로 우리가 독재 국가로서 나쁜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을 씻고 이 나라 국민과 국가가 국제 사회에서 명예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 다섯 가지가 저의 혁명의 목적이었습니다. ”

김재규는 ‘내가 (거사를) 안 하면 틀림없이 부마항쟁이 5대도시로 확대돼서 4·19보다 더 큰 사태가 일어날 것이다’고 판단했다.

이승만은 물러날 줄 알았지만 박정희는 절대 물러날 성격이 아니라는 판단을 했다. 차지철은 ‘캄보디아에서 300만을 죽였는데 우리가 100만~200만 명 못 죽이겠느냐’고 했다. 그런 참모가 옆에 있고 박정희도 ‘옛날 최인규와 곽영주가 죽은 건 자기들이 발포 명령을 내렸기 때문인데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면 나를 총살시킬 사람이 누가 있느냐’라고 말을 했다. 이에 김재규는 더 큰 희생을 막기위해서 했다고 한다.

범행동기
(1)우발적 범죄설
김재규 본인은 1979년 12월 18일 계엄군법회의 최후진술에서 "민주화를 위하여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계획적인 혁명 거사였다" 라고 주장했지만, 대부분 알려진 정설은 박정희의 무조건적인 차지철 신임과, 그로 인한 김재규와 차지철의 갈등 때문에 김재규가 우발적으로 저지른 범행이라는 것이다.

(2)미국의 박정희 제거 지령설
10.26 사태 며칠 전 김재규는 로버트 브루스터 CIA 한국지부장을 면담했다. 이 일로 미국이 박정희의 죽음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3] 김재규는 군사재판에서 사상 최악에 이른 한미관계의 개선을 자신의 거사의 한 이유로 들었지만 미국의 직접적인 개입은 부정했다. 주한미국대사 글라이스틴은 김재규의 한미관계 발언을 '쓰레기 같은 소리'라면서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최근 2011년 1월 18일에는, 한 재미 동포에 의해 김재규에 관한 미국의 당시 비밀문서가 모두 비공개 처리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하던 당일 오후 2시에 글라이스틴 주한미국대사를 만난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 김재규의 박정희 암살에 대한 의문과 관심이 한층 더 높아지기도 했다.

2004년에는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에서 김재규 부장에게 명예회복을 시도하는 등 10·26 사건에 대한 재평가 시도가 있었으며, "안중근과 같은 의사다" 와 같은 주장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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