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세종=청주일보】김흥순 = 1979년 10월 16일 부산ㆍ마산 시민항쟁(부마항쟁)이 시작됐다. 부산대 교내집회로 시작된 시위는 저녁 무렵 부산 중심가로 번지면서 지역 대학은 물론 시민과 상인, 고교생까지 가세했고, 18일부터는 인근 마산(현 창원)지역으로 확산돼 수출자유지역 노동자들도 시위에 동참했다.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현장을 시찰한 게 19일이었다.

“제가 내려가기 전까지는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이나 학생이 주축이 된 데모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현지에서 보니까 그게 아닙니다.

160명을 연행했는데 16명이 학생이고 나머지는 다 일반 시민입니다. (…) 데모하는 사람들도 사람들이지만 그들에게 주먹밥을 주고 또 사이다나 콜라를 갖다 주고 경찰에 밀리면 자기 집에 숨겨주고 하는 것이 데모하는 사람과 시민들이 완전히 의기투합한 사태입니다.” -10ㆍ26 재판에서 전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대통령 박정희 저격 결심의 주요 계기로 ‘부마 항쟁’을 대며 위와 같이 증언했다.

1979년 10월 16일 부터 10월 20일 까지 부산과 마산에서 일어난 박정희의 유신체제에 반대한 민주화운동을 말한다. 이는 유신의 종말로 가는 위대한 운동이었다.

부산과 마산은 4.19, 10.26 등 격동기의 한국민주주의의 리트머스 시험지다. 그곳은 정의로운 기상이 가장 먼저 나타나는 곳이다.

1979년 10월 부마민주항쟁의 시작
1979년 10월 16일부터 20일까지 부산과 마산의 학생 및 시민들에 의해서 4·19혁명 이후 최대 규모의 반독재 민주항쟁이 일어났다. 먼저 부산에서는 10월 16일 오전 10시에 시작된 부산대생들의 교내시위가 순식간에 4,000여 명으로 불어나면서 거리로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버스에서 내린 학생들이 오후부터 부산시청 앞과 광복동, 남포동 일대에 집결하여 ‘유신 철폐’와 ‘독재 타도’를 부르짖었다. 오후 늦게는 동아대생들의 합류로 더욱 확대된 시위 대열이 국제시장 일대를 게릴라식으로 종횡무진 누비고 다녔다.

시민들은 박수를 치고 경찰의 진압 작전을 방해하며 쫓기는 학생을 숨겨주는가 하면 빵과 음료수, 담배, 물수건 등을 던져주며 열렬히 호응하고 시위대를 격려하였다.

저녁 7시경에는 5~7만여 명의 인파가 부영극장 앞 간선도로를 꽉 메운 채 시위의 물결을 이루었다. 퇴근길의 회사원과 노동자, 상인, 접객업소 종업원, 재수생, 교복 입은 고등학생까지 가세하였다.

밤이 되어 시민들이 합세하자 시위는 폭력투쟁의 양상으로 바뀌어 갔다. 파출소, 어용신문사와 방송사, 경찰차에 투석하고 방화하는 등 이튿날 새벽 2시까지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였다.

부산대가 긴급휴교에 들어간 17일에도 시위는 비슷하게 전개되어 중구, 서구, 동구 지역의 거의 모든 파출소와 경찰서, 공공기관이 공격당했다. 이틀간의 격렬한 시위로 경찰 차량 6대가 전소되고 12대가 파손되었으며, 21개소의 파출소가 불타거나 파괴되었다.

KBS, MBC, 부산일보사, 경남도청, 그리고 TBC-TV 취재 차량이 투석당하고 피해를 입었다. 당시 부산시가 집계한 자료에 따르면, 부상자는 16일 하루 동안에만 학생 5명, 일반시민 10명, 경찰 95명 등 도합 110명으로서 그 가운데 중상자는 18명이었다. 그러나 시민들로선 자진신고를 기피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 상황을 감안할 때, 실제 피해는 그보다 훨씬 컸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마항쟁의 확대
마침내 18일 0시를 기해 부산 일원에 계엄령이 선포되고, 전방 공수부대 2개 여단 5,000여 명이 부산에 투입되었다. 그러자 시위는 마산으로 번져갔다.

10월 18일 경남대 학생 1,000여 명이 기동 경찰 300여 명과 대치하다 투석전을 벌였고, 3·15의거탑에서 1,000여 명이 스크럼을 짜서 유신 철폐와 독재 타도 및 언론자유를 요구하는 시위를 전개하는 등 시내 곳곳에서 대규모 시위가 전개되었다.

저녁부터는 학생들과 시민 수천 명이 시내 중심가를 메우고 경찰과 투석전을 벌이는 대규모 군중 시위를 전개하였다. 마산에서의 시위는 한층 더 폭력적으로 격화되어갔다.

공화당사, 파출소, 방송국이 어김없이 파괴되었다. 이에 인근의 창원, 진해, 함안 등지에서 경찰 병력이 넘어오고, 2개 중대의 군인까지 투입되어 시위대를 진압하였다. 경남대는 18일부터 무기한 휴교에 들어갔으나, 19일 학생들과 시민들의 경찰 차량 방화, 파출소·언론기관·관공서 등 공공기관에 대한 파괴 행위가 계속되었다.

대학생과 일부 고교생은 물론, 노동자, 폭력배, 구두닦이, 접객업소 종업원 등 도시 하층민들이 대거 가세하여 경찰, 군인과 충돌하면서 격렬한 시위를 벌여나간 것이다. 그리하여 마산의 항쟁이 수출자유지역 노동자와 고교생까지 합세, 더욱 확산될 조짐을 보이자 정부는 10월 20일 0시를 기해 마산과 창원 일원에 위수령을 발동하였다.

나흘간의 봉기를 통하여 부산에서 1058명, 마산에서 505명 등 총 1563명이 연행되었다. 군법회의에 회부된 87명(학생 37명, 일반인 50명) 중 단순가담자 67명은 소가 취하되었고, 20명(학생 7명, 일반인 13명)은 실형을 선고받았다. 일반 검찰에 송치된 31명(학생 26명, 일반인 5)은 전원이 소가 취하되었고, 651명(이 중 208명은 부산 봉기 학생)은 즉결심판에 회부되었다.

부마항쟁의 역사적 의미
부마항쟁은 서슬 퍼런 긴급조치시대의 숨 막히는 억압 구조를 뚫고, 4월혁명 이후 처음으로 본격적 민중항쟁의 지평을 다시 열었다. 그런 점에서 부마민주항쟁은 1970년대 반유신운동의 귀결점이자 총결산이었다.

부마항쟁은 학생운동이나 소수 명망가들에게 국한되어 있던 '70년대의 그 어떤 반독재 민주화운동보다도 정권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으며, 그로써 답보상태에 처해있던 '70년대 학생 및 재야 중심 민주화운동의 한계를 뛰어넘어 '80 년대의 광주항쟁과 6월항쟁이라는 대규모 반독재 민주항쟁의 도래를 예고하는 역할을 했다.

부마항쟁은 단순히 '70년대 반유신운동의 귀결점으로만 머물지 않고 그 철옹성 같던 박정희의 유신정권을 붕괴시킨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부마항쟁은 당시 전국의 각 대학으로 확산되어갈 조짐을 보이던 유신말기 반독재 항쟁의 거대한 중심으로 솟아오르면서 정권 내 권력암투를 보다 급속히 자극하여 10 · 26사태와 박정희 정권 몰락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4월 혁명이 이승만 정권을 직접 무너뜨렸던 것과 달리 부마항쟁은 그 것이 직접 유신정권을 붕괴시키지 못했다.

유신정권을 직접 쓰러뜨린 것은 10.26사태 즉, 박정희가 자신의 최측근이던 김재규에 의해 피살되는 사건에 의한 것이다. 그래서 부마항쟁은 유신정권 붕괴의 하나의 배경쯤으로 이해되는 면도 있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정권의 동요나 내부분열, 10.26 박정희 피살에 이르기까지 민중들이 지속적으로 끈질기게 저항해 왔으며 그 분수령을 이룬 것이 부마항쟁이라는 점이다.

1979 부마민주항쟁 일지
10월 16일 오전 10:00
부산대생 4천여명 교내시위
10월 16일 오전 2시 - 10월 17일 새벽 1시
부산지역 학생과 시민 5만명 중구, 서구 일원 시위, 11개 파출소 타격
10월 16일 오후 10시
부산지역 통행금지 연장 방송
10월 17일 오후 11시
동야대생 2천여명 교내 시위
10월 17일 오후 6시 - 10월 18일 새벽 1시
중구일대 시위, 21개 파출소, 경남 도청, 중부세무소, KBS, MBC, 부산일보, 동사무소 타격
시위진행방향
1) 충무동 - 서부경찰서 - 동대신동 - 구덕운당장
2) 영선고개 - 초량 - 구 KBS부산방송국(고관) - 동부경찰서
10월 18일 자정
부산일원 계엄령 선포, 계엄군 1만여명 지주
10월 18일 오후 2시
마산 경남대생 시위
10월 18일 오후 7시 - 9시 새벽 2시
마산 학생, 시민 1만여면 3.15의거탑 - 불종거리 - 오동동다리 방면 시위
검찰청, 법원, 공화당사, 마산MBC, 파출소 다소 타격
10월 18일 오후 10시
마산 창원지역 통행금지 연장 발표
10월 19일 오후 8시 30분 - 20일 새벽 3시
마산 지역학생, 시민 6천명 창종 - 오동동 - 남성동 - 시청방면 시위
타격대상은 10.18과 유사
10월 20일 오전 12시
마산, 창원 일원에 위수령 발동
10월 26일 저녁
서울 궁정동에서 김재규에 의해 박정희 피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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