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세종=청주일보】김흥 순= 1962년 10월 14일 미국 U-2 정찰기가 쿠바 상공 정찰을 통해 소련 미사일 기지를 찾아내 쿠바 미사일 위기가 시작될 증거가 탐지된 날이다.

쿠바 미사일 위기는 1962년 10월 22일부터 11월 2일의 11일 동안 소련의 중거리 핵미사일을 쿠바에 배치하려는 시도를 둘러싸고 미국과 소련이 대치하여 핵전쟁 직전까지 갔던 국제적 위기를 말한다.

그것은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미국ㆍ소련에 있어서 가장 심각한 위기였다. 1962년은 케네디 미국정권과 흐루시초프 소련정권간에 심각한 대립ㆍ긴장의 관계에 있었다.

흐루시초프 정권은 전년 1961년 8월 중순 동독일에 '베를린의 벽’을 구축하도록 지시하였다. 냉전의 전성기에 발생한 쿠바미사일위기는 미소간의 핵전쟁의 위험조차 포함한 것이었다.

미국이나 소련이나 엄청난 긴장이었다.
"세계가 대참사의 벼랑 끝에 놓였을까? 우리가 착각한 것일까? 실수일까? 뭔가 빠뜨린 조치는 없을까? 하지 말았어야할 조치는 없을까? 케네디 대통령은 손을 얼굴로 가져가 입을 가렸고,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다. 얼굴이 굳어 보였고, 근심 가득한 눈은 거의 창백했다. 우리는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쳐다보았다.

아주 잠깐 동안, 마치 회의장에 아무도 없고 케네디 대통령은 더 이상 내가 알던 대통령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13일' 57쪽에서 쿠바 미사일 위기때 케네디 대통령의 동생 로버트 케네디는 형이자 대통령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했다.

1961년 1월 20일, 대통령에 취임한 케네디는 취임사에서 소련의 세력 확장을 경고한다. 4월 17일, 미 CIA의 지원을 받은 쿠바 망명자 1,400명이 피그스만 침공 작전에 나섰으나 실패한다.

6월 4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미소 정상회담이 개최된다. 케네디 대통령과 흐루쇼프 서기장은 베를린 문제를 둘러싸고 첨예하게 대립한다.

8월 13일, 소련측이 냉전의 상징이 되는 베를린 장벽 건설을 시작한다. 미국 정부는 소련의 도발 시 핵무기를 사용할 수도 있다고 언급한다. 1961년 10월, 소련은 역사상 가장 강력한 수소폭탄 ‘차르 봄바’ 폭파 실험 실시한다.
그러나 당시 소련이 미국을 공격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탄은 6기에 불과한 반면, 미국은 100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게다가 미국은 영국, 이탈리아, 터키에 미사일 기지를 구축한 상태였고 흐루쇼프도 이런 군사적 열세를 잘 알고 있었다.

1962년 늦여름부터 미국의 쿠바 침공 가능성을 우려한 소련은 쿠바에 군사 장비 지원 확대한다. 여기에는 탄도미사일이 포함된다. 미국은 소련이 자국 바깥에 미사일을 배치한 사례가 없다는 사실을 근거로 쿠바에 공격용 무기를 배치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오판한다.

1962년 10월 14일, U-2 고고도 정찰기가 쿠바 서쪽 정찰 활동 중 준중거리미사일(MRBM) 기지 건설 상황을 최초로 포착한다.해당 미사일은 뉴욕과 워싱턴을 포함해 미국 본토의 절반을 사거리 안에 둔 것으로 판단되었다.
10월 16일, 대통령 안보보좌관인 맥조지 번디가 케네디 대통령에게 U-2 정찰 결과를 보고한다. 이로써 13일간의 쿠바 미사일 위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쿠바는 미국의 플로리다 반도의 끝에서 불과 230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으며 미국은 이 지역에 소련에 대한 레이더 조기경계 시스템을 개발하지 않았다.

쿠바에 반입된 42기의 소련의 핵미사일은 미국의 본토를 사정거리에 충분히 둘 수 있는 것이었다. 당시의 미국은 소련에 대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의 수에서 약 5대 1의 우위에 있었지만 쿠바에 반입된 소련의 핵미사일에 전략적 위협을 받고 있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었다.

J.F. 케네디 대통령은 문제를 국제연합안전 보장이사회에 붙이는 한편 긴급하게 미주기구회의를 개최하여 소련에 대해서 핵미사일의 즉시 철거와 미사일기지의 파괴를 요구하였다.

케네디 대통령은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열어 쿠바와 소련으로의 대응을 협의하였지만 쿠바에 대한 공중폭격과 상륙이라는 강경 작전을 피하고 소련의 상선의 쿠바 접근을 저지하는 해상봉쇄를 결정하고 위기 속에서도 흐루시초프 총리와의 협상의 여지를 남겨 두었다.

그러나 케네디 대통령의 대(對)소련 요구의 메시지는 소련이 핵미사일과 기지의 철거ㆍ파괴에 응하지 않으면 미국은 소련과의 전면전쟁도 불사하겠다고 하였다.

이런 속에서 소련은 1962년 10월 26일 미국이 쿠바를 침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약속한다면 미사일을 철거하겠다는 뜻을 미국에 전달하고, 10월 27일 쿠바의 소련 미사일기지와 터키의 미국 미사일기지의 상호철수를 제안하였다.

이에 대하여 미국은 10월 26일의 제안을 수락할 것을 결정하였다. 흐루시초프 총리는 10월 28일 미국의 요구를 전면적으로 받아들이기로 결정하고 위기는 2주만에 끝나게 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소는 냉전의 와중에서도 워싱턴과 모스크바를 연결하는 '핫라인’(hot line : 긴급통신연락망)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미소는 이 위기를 계기로 영국과 함께 '부분적 핵실험금지조약’(모스크바조약 1963년 8월)을 체결하였다.

쿠바미사일 위기의 멈춤은 양국 정상과 보좌진의 현명한 판단도 있었지만, 「SECRET OF THE DEAD "The Man Who Saved the World」 에 나온 이야기처럼 사건 당시 핵미사일 발사를 거부해 전쟁을 막은 소련군 잠수함 장교도 있다. 북한 미사일 위기와 관련해 생각해 볼 이야기다.

(사진)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직업The Loneliest Job」.〈뉴욕타임스>의 조지 테임스가 1961년 2월 10일에 촬영한 이 사진은 나중에 쿠바 미사일 위기의 상징이 된다. 한국의 대통령도 고독한 직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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