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세종=청주일보】김흥순=1일본이 우리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러시아와 전쟁을 한다고 공언하더니 끝내 우리의 국권을 빼앗고 토지를 약탈하였다.

그들은 우리의 생명을 없애려 하였고 자유행동을 못하게 하였다. 나는 미국에 와서 학업을 닦아가지고 대한에 헌신하기로 결심했는데 스티븐스가 한국의 월급을 먹는 자로 일본을 천조하며 우리의 조국을 배반하는 일을 했다.

나는 애국심으로 그 놈을 포살하려고 했다.-선생이 미국 법정에서 밝힌 의거의 변(辯) 중에서

1900년대 초, 일본은 우리나라를 집어삼키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시도한다. 그 시도는 주권 국가로서 외국과 외교를 할 수 있는 권리인 ‘외교권’을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미국의 외교관 스티븐스에게 쥐어주면서 더 가속화되기 시작했다

이를 더 이상 용납할 수 없었던 한 독립투사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죽암 전명운 의사다.

1908년 3월 23일 오전 9시 30분, 권총과 스티븐스의 사진 한 장을 준비, 오클랜드 선창에서 대기하였다가 하차하는 스티븐스를 권총으로 쏘았으나, 불행히도 불발로 끝났다.

이에 권총자루로 스티븐스의 얼굴을 강타하고 격투 중, 역시 스티븐스를 저격하기 위해 기다렸던 장인환(張仁煥)이 스티븐스를 저격하는 과정에서 유탄에 어깨 부분을 관통당하고 쓰러졌다.

장인환과 공범자로 체포되었다. 그 뒤 당당한 애국심에 감복한 재판관이 전명운을 무죄로 선고, 1908년 6월 27일 석방되었다.

전명운은 장인환의 재판 중 신변의 위험을 느껴 이름을 마크 필즈(Mark Fields)로 고치고, 변호사의 권유로 1908년 12월 시베리아 해삼위(海蔘威 : 블라디보스토크)로 피신하였다.

이곳에는 1907년 안중근(安重根) 의사가 망명, 장차 이토(伊藤博文)를 죽일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므로 전명운의 저격사건은 안중근의 거사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것이다.
전명운 의사
1884년 6월 25일, 현 명동성당 부근인 서울 종현에서 아버지 전성근과 어머니 경주 이씨 사이의 13남매 중 7남으로 태어났지만,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어 맏형 조명선의 밑에서 자랐다.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자라왔음에도 불구하고 영특하고 용감해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을 가졌다 전해진다.
그러던 어느 날, 의사는 1898년 10월에 개최되었던 독립협회 만민공동회를 우연히 참관함을 계기로 신학문 수용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껴 관립 한성학교에 입학해 1902년까지 수업과정을 마쳤다.

이후 의사는 우리 조국의 자주화와 근대화에 기여하고자 하는 마음에 미국 유학을 결심했다. 더 큰 나라에서 학업을 닦아 조국 독립을 위해 사용하고자 결심했다.

선생은 1903년 9월 하와이의 사탕수수와 파인애플 농장에서 일을 하며 학비를 마련한 다음, 1904년 9월 23일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여 본격적인 유학 생활을 시작한다.

1905년 4월 안창호 선생이 조직한 항일 민족운동 단체인 공립협회에 가입해 청년회로 활동하기 시작하였고, 같은 해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관련 토론회가 개최될 때마다 국권회복운동을 강력히 주장하며 일제의 침략행위를 규탄하는 모습을 보였다.

전명운 의사가 미국 유학을 하고 있던 시기, 일본에서는 우리나라 외교고문으로 스티븐스를 임명한다. 그는 주일 공사관 서기관 출신으로, 주재국인 일본정부에 유리하도록 외교 사무를 처리해 주미 일본 공사관 서기관으로 임명된 사람이었다.

그는 1904년 ‘한일협약’을 강제하고 고문정치를 자행하기에 이른다. 이어 ‘을사늑약’, ‘정미7조약’등 우리나라로써는 치욕적인 사건들을 겪게 하는데 앞장선다.

한편 일본의 만행은 미국에도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었다. 반일운동이 확산되자 미국 정부에서는 1907년 11월 <일본인 이민 금지법안>을 의회에 제출하자 일본은 스티븐스를 미국으로 파견해 관계 순화와 한국에서의 통감정치 선전, 재미 한인동포들의 움직임을 방해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이면으로는 만주에서의 이권 확보를 위해 러시아와 비밀협약을 추진하기 위해 미국의 사전 양해를 구해오라는 숙제를 안고, 스티븐스는 고국으로 돌아온다.

“일본이 한국을 보호한 후로 한국에 유익한 일이 많으니 근래 양국간에 교제가 친밀하며, 일본이 한국 백성을 다스리는 법이 미국이 필리핀을 다스리는 일과 같고, 한국에 새로운 정부가 조직된 후로 정계에 참여하지 못한 자가 일본을 반대하나 농민들과 백성은 예전 정부의 학대와 같은 대우를 받지 아니하므로 농민들은 일인들을 환영한다.”

그리고 도착하자마자 그는 위의 망언을 하며 일본의 만행을 왜곡하였다. 그의 망언은 다음날 샌프란시스코의 각 신문에 보도되었다.

스티븐스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접한 공립협회와 대동보국회에서는 항의 대표단을 파견하기로 결정한다.

공립협회의 최정익•정재관, 대동보국회 문양목•이학현 등 4명의 대표는 스키븐스를 방문해 해명을 요구하지만 스티븐스는 “한국에 이완용 같은 충신과 이등박문 같은 통감이 있으니 한국에 큰 행복이라”는 2차적 망언을 내뱉는다.

또 백성이 어리석어 독립할 자격이 없다는 등의 소리를 덧붙이자, 항의 대표단은 이에 격분해 공동회에 모두 보고한다.

공동회에 참석하였던 전명운 의사 또한 소식에 격분한다. 이미 개인적으로 스티븐스를 방문할 계획을 세우고 있던 의사는, 스티븐스의 말과 달리 우리나라는 일제의 통치를 원치 않는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 그를 처단해야겠다고 생각한다.

1908년 3월 23일 오전 9시,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페리 정거장에 나온 스티븐스를 권총으로 저격지만 안타깝게 빗나가자 뛰어들어 그를 권총으로 내리친다.

이 때 같은 목적으로 대동보국회 회원인 장인환이 쏜 세 발이 스티븐스의 몸을 관통하였고, 그는 결국 3일 후에 사망한다. 그 때 어깨에 총을 맞은 전명운 의사도 함께 병원으로 실려갔는데 이후에 스티븐스 사망 소식을 듣고 병상에서도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다고 한다.

1909년 7월에 로스앤젤레스로 돌아온 전명운은 결혼, 1남 2녀를 두었으나, 1929년 상처를 하였다. 그 후 생계가 막연해 아이들을 고아원에 맡겼는데, 외아들은 죽고, 딸 둘(경숙·경용)이 미국에 살고 있다.

1945년 조국 광복을 맞이하였지만, 비참한 생활고 끝에 1947년 11월 19일 사망하였다. 로스앤젤레스 위티어(Whittier) 천주교묘지에 안장되었다.

저작권자 © 청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