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세종=청주일보】김흥순 =2017년, 과연 우리의 믿음은 바로 세워져 있는가?

개혁과 변화의 시대를 이끈 위대한 지도자 ‘마르틴 루터’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작 <루터>! 진정한 믿음의 방향을 되돌아보자!
종교가 세상을 걱정하는게 아니라 세상이 종교걱정을 하고 있다

2014년 개봉한 한국의 마이클 무어라 불리는 김재환 감독의 '쿼바디스'를 보면 현 종교 실태가 우리를 충격에 빠뜨린다. 예수님 팔아 회사를 운영하는 것과 같다.

대형화, 상업화, 면죄부의 일상화를 넘어 이제는 세습화까지 갔다. 세금은 아예 내려고 하지도 않는다. 자신들도 근로자라며 면세를 요구한다.

가난한 예수는 없다.
호의호식으로 잘 사는 예수 주식회사 영업사원들만 넘친다.

영화 <루터>를 보면 현재를 다시 보게 된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단순히 기독교라는 종교의 울타리 안에 그치는 사건이 아니다.

처음에는 가톨릭 교회 내의 자정(自淨)을 요구하는 것으로 시작된 종교개혁은 결국은 신앙의 자유를 넘어 정치·사회적 자유, 경제적 자유를 쟁취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종교개혁이 ‘근대의 탄생’을 이끈 것이다.
마침 올해는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해다.
제임스 레스턴의 <루터의 밧모섬(원제 Luther's Fortress)>

고난의 수도사
영화는 젊은 루터가 폭풍우를 만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벼락이 내리치는 가운데 루터는 성(聖) 안나를 찾으면서 자신을 살려주면 수도사가 되겠다고 맹세한다. 그 맹세대로 루터는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의 수사(修士)가 된다.

자수성가한 아버지와 등을 돌리면서까지 선택한 길이지만, 루터의 수도사로서의 삶은 위태위태하다. 수시로 악마와 만나면서 자신의 신앙심이 부족함을 자책한다. 그런 루터에게 버팀목이 되는 건 그의 지도신부인 요한 폰 슈타우피츠다. 그는 루터에게 묻는다.

“루터, 자네가 찾는 게 무엇이지?”
루터는 말한다.
“긍휼의 하나님, 제가 사랑할 수 있는 하나님이요!”
이때 이미 루터에게는 반란의 싹이 나타났던 셈이다.

인간을 영원한 지옥불 속에, 그게 아니더라도 수백 수천 년 동안 죄값을 해야 천국으로 갈 수 있는 연옥으로 던져 버리는 ‘심판의 하나님’을 루터는 거부한 것이다.

슈타우피츠는 루터의 신앙심을 고취할 생각으로 그를 로마로 보내지만 루터는 로마에서 타락과 부패를 본다. 가난한 민초들, 매춘부를 구하는 성직자들, 성물 숭배…. 전보다 더 혼란스러워져 돌아온 루터는 스승 슈타우피츠에게 말한다.

“로마는 문란했어요. 시궁창이었어요. 여자든, 구원이든, 전부 돈으로 살 수 있더군요.”
슈타우비츠는 루터를 비텐베르크대학으로 보낸다. 신학 박사 학위를 딴 루터는 소외받은 민중들을 보살피고, 재치 있는 강의로 학생들을 사로잡는 인기 교수가 된다.

그 무렵 교황 레오 10세는 로마의 성피에트로 대성당을 짓기 위해 면죄부(免罪符)를 판매한다. 루터가 말했던 ‘구원도 돈으로 살 수 있다’는 생각의 집약체가 바로 면죄부였다. 면죄부의 독일 판매책이던 도미니코수도회의 수도사 요한 텔칙은 지옥불에서 고통 받는 영혼들의 모습을 그린 그림을 펼쳐 보이며 이렇게 외친다.

“봉헌함에 금화가 딸그랑거리며 떨어지는 순간, 구원된 영혼은 천국으로 곧장 올라간다.”
장애가 있는 딸을 어렵게 키우던 가난한 어머니도 면죄부를 산다. 그리고 평소 따르던 루터에게 면죄부를 샀다고 자랑한다. 루터의 칭찬을 기대하면서…. 루터는 그녀에게 말한다.

“그건 종이쪽일 뿐”이라고, “그걸로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고….
분노한 루터는 비텐베르크교회 문에 대자보를 못질한다. ‘95개조의 반박문’이라는 이 대자보에서 루터는 교황의 면죄부 판매 행위를 신랄하게 비난한다. 종교개혁의 시작이었다.

루터의 대자보는 활판인쇄술에 힘입어 순식간에 독일 전역으로 전파된다. 교황은 중세인들의 삶은 물론 내세까지도 지배하던 ‘신의 대리인’이었다. 그런 교황에게 도전했으니, 이후 루터의 삶이 편할 리가 없다.

홀로 선 용기
“우리는 당신 편이다. 힘내라”고 격려하는 동료 교수와 시민들에게 고마워하는 루터의 모습을 보는 대목에서부터 눈시울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은 작은 말 한 마디에 고마워하는 그 모습에서 그 속에 담긴 고독감과 두려움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거대한 위선의 시대에 홀로 맞선 사내의 고독감, 두려움….
남의 얘기 같지 않다.

거짓이 진실이 되고, 불의가 정의가 되고, 반역이 애국이 되는 탁류 속에서 어려움에 처한 이들의 얼굴이 대한민국의 자화상이다.

루터가 ‘95개조의 반박문’을 철회할 것을 강요하는 교황의 사절 앞에서 당당하게 이를 거부하는 장면에서, 스승 슈타우피츠가 아우구스티노 수도원 밖으로 루터를 밀어내며 “나는 더 이상 너의 지도신부가 아니다”라고 말할 때 망연자실해 하는 루터의 모습을 보며,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가 소집한 보름스 국회에서 루터가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기를 거부하면서 “주여, 제가 여기에 서 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대목

‘저런 상황에 처했을 때, 너는 저렇게 당당할 수 있겠느냐?’
지금 우리는 거짓이 지배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영화 <루터>에 더 절실하게 공감하게 되는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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