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설] 1953년 4월 16일 독립운동가 오세창(吳世昌) 사망

청주일보l승인2018.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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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세종=청주일보】김흥순= 변절과 친일의 시대를 견뎌내고 민족지도자가 된 독립운동가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한말의 독립운동가·서예가·언론인.

판사: 조선에서 민족자결의 취지에 의하여 독립선언을 발표하고, 운동을 하게 된 것은 어떻게 된 일인가.

오세창: 그것은 세상의 풍조를 생각하고, 다른 사람이 주창하므로 가담했는데, 하나는 전세계의 사람이 민족자결로 소요하고 있는데 홀로 조선만이 침묵하고 있기보다, 실행은 되지 않더라도 역사에 남기기 위하여 조선인도 민족자결의 의사가 있다는 것을 발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경성지방법원, (오세창 신문조서)중에서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1864~1953)의 이름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점점 잊혀져 가고 있는 것은 참으로 미안하고 안타까운 일이다.

위창은 개화기와 일제강점기의 격동기에 살면서 개화사상을 익히고 ‘만세보’ 사장을 역임한 초기 언론계의 리더였다.

3·1독립운동 때는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이었고, 1945년 일제가 패망한 뒤 남한에 진주한 미군정이 주인 잃어버린 조선왕조의 옥새를 대한민국에 넘겨줄 때 국민을 대표해 인수받은 나라의 큰 어른이셨다.

해방 공간에서 우후죽순으로 정당이 난립할 때 앞다투어 위창을 고문으로 모셔갔고, 이승만, 김구, 여운형 등이 미군정을 자문하기 위해 결성한 ‘민주의원’ 28명 중 한 분이었다.

1953년 동란 중 향년 90세로 세상을 떠났을 때 대구에서 사회장으로 모신 분이 위창 오세창이시다. 위창 자신은 근대의 서예가로 전서(篆書)에서는 타의추종을 불허했으며, 당대의 안목으로 뿔뿔이 흩어져 있는 옛 그림과 글씨 수천점을 집대성해 <근역화휘(槿域畵彙)> <근역서휘(槿域書彙)> <근묵(槿墨)> <근역인수(槿域印藪)> 등을 편찬했고, 역대 서화가 인명사전인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이라는 불후의 고전을 남기셨다.

뿐만 아니라 고미술계의 지도자로서 민족미술인들의 단체인 서화협회 고문이었고, 간송 전형필 선생의 고서화 수집품은 거의 다 위창의 안목과 지도 아래 이루어진 것이었다. 위창의 유작 중에는 문화로 나라를 지킨다는 ‘문화보국(文化保國)’이라는 작품이 있는데 당신이야말로 ‘문화보국의 위인’이라 할 만한 분이다.

오세창(吳世昌)선생은 한성 중부 이동(현 을지로 2가)에서 대대로 역관을 이어온 중인 집안의 자제로, 아버지인 역매(亦梅) 오경석(吳慶錫)과 모친 김해 김씨 사이에서 1남 1녀의 독자로 태어났다.

선생은 자신을 포함하여 8대가 역관을 지낸 전형적인 중인계층 출신이었다. 그리고 부친 오경석은 초기 개화파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8살이 되던 해에 부친과 함께 초기 개화파를 대표하던 한의학자 유대치를 스승으로 모셨으며 8년여의 연마 끝에 선생은 16살이 되던 1879년 역과에 합격, 1880년 사역원에서 관료생활을 시작했다.

청년 개화파 세력이 주도한 갑신정변의 화마를 용케 피할 수 있었던 선생은 1886년부터 개화파 관료로서의 본격적인 행보를 걷는다. 갑신정변 와중에 폐지되었다가 다시 설치된 박문국이 속간한 <한성순보>의 기자로 활약하게 된 것이다.

1894년에는 갑오경장의 중추기관인 군국기무처에서 관리생활을 했다.다음해에는 정3품에 올라 경제관료로서 농상공부에 근무했다. 또한 통신국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1897년 일본 문부성의 초청으로 동경 외국어학교의 조선어 교사를 지낸 후 1년 뒤 귀국한 선생은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칩거에 들어갔다.

1886년 박문국(博文局) 주사로 공직생활을 시작하여 《성순보(漢城旬報) 기자를 겸하다가 1894년 군국기무처 총재비서관·농상공부 참의(參議)·우정국 통신원국장을 역임하였다. 1897년 일본 문부성(文部省)으로부터 동경외국어학교 조선어 교사로 초청받아 1년간 교편을 잡았다. 귀국 후 모함에 의해 정치범으로 몰리자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망명 중인 1902년 일본에서 양한묵(梁漢默)·손병희(孫秉熙)의 권유로 천도교 신자가 되었다.

1906년 귀국하여 만세보사(萬歲報社)와 대한민보사(大韓民報社) 사장, 대한협회(大韓協會) 부회장을 지냈다. 1919년 3·1운동 때 독립선언서에 서명 후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렀으며, 그 후 서화가의 친목기관인 대한서화협회(大韓書畵協會)를 창립, 예술운동에 진력하였다. 전서(篆書)와 예서(隸書)에 뛰어났으며 서화(書畵)의 감식에 깊은 조예를 가지고 있었다.

8·15광복 후 매일신보사(每日新報社)·서울신문사의 명예사장, 민주의원(民主議院) 의원,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 회장, 전국애국단체총연합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6·25전쟁 중 대구에서 피난 중 사망하여 사회장으로 장례식을 치렀다. 저서에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 근역인수(槿域印藪) 등이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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