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세종=청주일보】김흥순 = 우크라이나엔 ‘선불’ , 리비아엔 ‘후불’
북한엔 현금 박치기냐 어음이냐?

미국 정부 관계자들과 북한 전문가들이 지금까지 내놓은 의견을 종합해 보면, 구 소련 소속이었던 동유럽 국가의 비핵화, 리비아의 비핵화, 북한 비핵화는 각각 ‘선불’, ‘후불’, ‘어음’ 형태가 될 것으로 보인다.

미국 비핵화 전략의 표본 ‘CTR 프로그램’

1990년대 초반 결국 소비에트 연방이 무너지면서 냉전도 끝났다. 냉전이 끝난 뒤 세계에 평화가 올 것 같았지만 다른 문제가 나타났다. 바로 구소련이 만들어 놨던 핵무기의 처리와 핵과학자들의 처리였다.

당시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들, 러시아 등은 구소련의 핵무기들이 테러조직이나 범죄조직으로 팔려나갈 것을 우려했다.

그렇게 되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들이 ‘대량살상무기 비확산’에 노력해 왔던 수십 년이 날아가 버리는 것은 물론 전 세계가 핵테러의 위협을 받게 될 게 뻔했다.

이 같은 문제가 제기되자 미의회는 1991년 11월 27일 샘 넌 의원과 리처드 루가 의원이 발의한 ‘소련의 핵위협 제거 법안’을 토대로 수정한 ‘협력적 위협감소’ 법안을 상정, 통과시키게 된다.

법안에는 구소련 국가들이 소유하고 있는 핵무기와 화학무기 등 대량살상무기 폐기, 무기 폐기를 위한 이송·저장·해체·보관, 무기 폐기를 검증할 수 있는 조치 마련, 무기 해체 및 확산 방지에 필요한 기술적 문제를 해결하는 협력 방안 등이 담겨 있었다.

‘넌-루가 법안’으로도 불렸던, 이 ‘협력적 위협감소(Cooperative Threat Reduction)’ 프로그램은 간단히 말해 舊소련에 포함돼 있다 독립한 동유럽 국가에게서 핵무기를 가져와 美본토에서 해체하는 대신 해당 국가에게는 경제적 지원을 해준다는 개념이었다.

‘협력적 위협감소’ 프로그램에 해당되는 나라는 러시아 일부와 우크라이나, 벨로루스, 카자흐스탄이었다. 미국과 영국이 핵폐기에 필요한 비용을 부담했고, 러시아는 무기 해체를 보증하는 형태로 개입했다.

소련이 해체된 뒤 우크라이나는 176기의 탄도미사일과 1,800여 기의 핵탄두를 보유하게 됐다. 졸지에 세계 3위의 핵무기 보유국이 됐다. 우크라이나 내부에서는 그동안 폭압정치를 해온 러시아가 언제 다시 쳐들어올지 모른다며 핵무기를 계속 보유하자는 의견과 다른 나라를 자극할 무기는 필요 없다는 의견이 대립했다. 이후 우크라이나 의회에서 ‘핵보유’를 주장하는 세력이 우세해지면서 국제적 갈등이 초래되는 듯했다.

당시 클린턴 美행정부와 옐친 러시아 행정부가 우크라이나 정부에게 핵무기 폐기의 반대급부로 상당한 경제적 지원을 약속하고, 미국과 영국, 러시아가 핵공격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서 ‘협력적 위협감소’ 프로그램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1993년 말까지 우크라이나, 벨로루스, 카자흐스탄의 핵무기는 모두 제거됐고, 해당 국가들은 핵무기 확산방지 조약(NPT)에 가입했다.

2004년 2월 22일 ‘자유아시아방송(RFA)’ 보도에 따르면, 미국은 1992년부터 2000년 말까지 ‘협력적 위협감소’ 프로그램에 60억 달러의 예산을 썼다고 한다. 대신 5,000개 이상의 핵탄두, 400개 이상의 탄도미사일, 수백여 기의 미사일 발사대와 폭격기를 안전하게 해체하는 성과를 올렸다고 한다.

이와 함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벨로루스, 카자흐스탄에 거주하던 핵무기 개발 전문인력의 관리도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고 한다.

미국은 이를 위해 1992년 모스크바에 ‘국제과학기술센터’를, 우크라이나 키예프에 ‘과학연구센터’를 설립해 3만 7,000여 명의 핵무기 관련 전문가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했다고 한다. 이 과학센터 활동에는 미국뿐만 아니라 EU, 일본, 캐나다, 노르웨이, 스웨덴, 한국 등도 동참해 예산을 지원했다고 한다. 여기에 더해 구소련이 운영하던 ‘핵개발 도시’를 정상적인 도시로 만드는 작업에도 예산을 지원했다고 한다.

이처럼 ‘협력적 위협감소’ 프로그램은 “적이 갖고 있거나 위험한 핵무기를 돈 주고 사서 없앤다”는 개념이었다. 당시 풍문에는 핵무기 폭발력에 따라 ‘가격’을 정해 돈을 준다는 말까지 나돌았다. 마치 장난 같았지만 이 방법은 잘 통했다. 어쩌면 우크라이나 등에게 ‘선불’ 형태로 보상한 것이 유효했는지도 모르겠다.

미국의 주도로 다른 나라의 비핵화가 이뤄진 두 번째 사례는 리비아의 핵 프로그램 폐기다.

1969년 9월 쿠데타로 집권한 무아마르 카다피는 수십 년 동안 반미 정책을 펼치며 테러조직을 지원했다. 1979년 12월에는 이란의 종교 지도자 호메이니를 지지하는 리비아 인들이 트리폴리의 美대사관을 방화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미국은 리비아를 테러지원국으로 지정했다.

그래도 리비아 정부의 반미활동과 테러조직 지원이 계속되자 미국은 1981년 5월 리비아와 단교했고, 석달 뒤 F-14 톰캣 전투기로 카다피가 머무는 곳을 폭격했다. 이 폭격으로 카다피의 아들들이 사망했다. 미국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후 리비아에 대한 외교적·경제적 제재를 가했다.

1988년 12월 ‘팬암 103편’이 스코틀랜드 허커비 지역 상공에서 폭발, 탑승했던 259명과 지역 주민 11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미정부는 추적 끝에 여객기 폭파는 테러이며 그 배후에 리비아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곧 국제사회에도 받아들여져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1992년 1월 제재 결의안 731호를 통해 對리비아 제재를 시작했다.

유엔 안보리 제재로 인해 산유국임에도 석유를 수출할 수 없게 됐고, 이로 인해 경제 기반이 붕괴해버린 리비아는 1999년 4월 ‘팬암 103편’ 테러 용의자 2명을 영국 법원에 인도했다. 2002년 5월에는 사고 유가족들에게 보상금 지급을 포함해 법적 책임을 지겠다고 약속했다.

리비아는 2003년 3월부터 영국 정부에게 접근,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9개월 동안 진행된 비공식 협상을 통해 리비아는 미국에게 핵무기와 화학무기 개발 프로그램의 완전한 폐기를 약속하고, 국제원자력에너지기구(IAEA)의 사찰을 즉각 수용한다고 밝혔다.

당시 외신 보도에 따르면, 리비아는 영국, 미국과의 협상 과정에서 양국 전문가들을 10여 차례 초청해 비밀 핵시설과 장비 등을 모두 공개했다고 한다.

리비아의 핵무기·화학무기 폐기 약속에 미국은 2004년 경제 제재를 풀고 연락사무소를 개설하며 관계 정상화에 나섰다. 2006년 5월에는 다시 트리폴리에 대사관을 열고 국교를 정상화했다. 테러지원국 명단에서도 뺐다.

리비아 핵폐기의 가장 큰 특징은 미국이 요구하기 전에 스스로 핵개발을 포기하겠다는 뜻을 밝혔고, 이것이 이뤄진 뒤 제재 해제, 카다피 체제의 안전 보장과 같은 보상이 있었다는 점이다. 쉽게 말해 ‘후불제 핵폐기’였다.

존 볼튼 前유엔 대사를 포함해 과거 6자 회담에 참여했던 미정부 관계자들은 북한 핵폐기와 관련해 ‘협력적 위협감소’ 프로그램이나 ‘리비아식 핵폐기’를 적용하면 될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현재 상황으로 볼 때 북한 핵폐기는 이와는 다르게 진행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북한의 핵무기 개발 상황과 호전성, 대미 신뢰도가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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