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세종=청주일보】김흥순 = 부끄러운 사실을 인정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부끄러움을 안다는 것은 옳고 그름을 분간할 수 있다는 뜻이다. 죽음으로 부끄러움을 표현한 노회찬의 부끄러움에 대한 반성.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하는 것, 즉 자아성찰의 계기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시인 윤동주의 곧은 정신은 시어 하나하나에 새겨져 있다. 부끄러움을 안다는 것. 70년 전 젊은 시인의 질문은 2018년 오늘에도 유효하다.

그래서 그럴까 고대 출신 노회찬의 몸은 연대출신 윤동주 있는 세브란스로 옮겨갔다.

부끄러움을 안다는 것은 동양에서 중요한 덕목리다

‘맹자’는 ‘부끄러움의 장(恥之章)’에서 “부끄러움은 내가 하늘에서 받은 본연의 수오지심(羞惡之心)이다. 그 마음을 간직하고 따르면 성현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지만 반대로 잃고 따르지 않으면 금수 같은 존재가 된다”고 했다.

관중의 업적을 담은 중국 고전 ‘관자(管子)’에서는 나라를 지탱하는 기둥으로 ‘예의염치(禮義廉恥)’를 꼽았다.

조선후기 학자 이만부는 문집에 담은 ‘부끄러움을 닦는 법’이라는 글에서 “부끄러운데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면 능히 부끄러움이 있게 되고, 부끄러운데 부끄러워하면 능히 부끄러움이 없게 된다”며 “이를 일러 부끄러움을 닦는다고 한다”고 했다.

위ㆍ아래를 막론하고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고 부끄러움과 담을 쌓ㅇ은 놈년들이 수두룩하다. 그 모든 부끄러움이 진정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들의 몫이었으면 좋겠다

자신의 일로 타인이 부끄러워해야 하는 일이 더는 생기지 않았으면 한다. 우리는 남의 부끄러운 짓 때문에 부끄러워해야 하는 딱한 수준을 이제 그만 넘어서서 나 자신의 부끄러움이 무엇인지 돌아볼 작은 여유를 갖게 되길 바란다.

박완서 소설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의 주인공은 잊고 지냈던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되찾은 순간 “마치 내 내부에 불이 켜진 듯이 온몸이 붉게 뜨겁게 달아”올랐다고 했다. 우리 모두 부끄러움을 아는 그런 “환희”를 누릴 수 있기를 고대해 본다.


이름도, 언어도, 꿈도, 모든 것이 허락되지 않았던 일제강점기.
친일독재, 군부독재, 자본독재에 맞섰던 진보정치인의 정치시대


염치가 없고 뻔뻔스러운 사람들의 얼굴을 쇠로 만든 낯가죽이라 해서 '철면피(鐵面皮)'라 한다.부끄러움을 모르면 뻔뻔해지고, 철면피가 될 수 밖에 없다.
 
부끄러움을 아는 것은 인간관계의 지속성으로 볼 수 있고,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사회는 인간관계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 사회성 관계가 붕괴된 상태로 볼 수 있다.

사람과 짐승의 차이점 가운데 하나는 부끄러움을 안다는 것이다.

뻔뻔함으로 일관해 온 더러운 적폐 세력 속에서 양심을 가지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자살에 대한 찬양은 안되지만, 그나마 든든한 주춧돌로 행동으로 부끄러움을 보여준 노회찬.

유독 ‘부끄러움’을 매개로 한 시어가 많이 등장하는 윤동주의 시 ‘참회록’ 같은 살다간 노회찬

자기 성찰을 토대로 한 순결성 추구에 닿아 있다.

참회(懺悔)는 “자기의 잘못에 대하여 깊이 깨닫고 반성”하는 행위다.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으며, 윤동주는 식민지 조국 현실을 마치 자신의 과오마냥 부끄러워했다.

비단 ‘참회록’뿐만이 아니다. ‘서시’, ‘쉽게 쓰여진 시’, ‘별헤는 밤’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품에는 온통 부끄러움의 정조가 투영돼 있다. 이 부끄러움이 울림을 주는 것은 내면 성찰이라는 자기 고백을 넘어 국가와 시대를 향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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