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세종=청주일보】김흥순 = 한국도 과거 역사에 기우제에 대한 기록이 많다. 작년에만 해도 이맘때 전국 명산과 사찰 등지에서 비를 기원하는 기우제가 열렸다. 과학기술과 관개시설 발달됐지만 가뭄은 정권의 명운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한국에서는 농업을 기본으로 삼아왔다.

농업에는 물이 필요하며, 그것은 곧 비를 의미하였다.

특히, 벼농사에는 적절한 강우량이 필요하나 우리 나라에서는 장마철에만 집중적으로 비가 내리고 그 전후에는 가뭄이 계속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따라서 수리시설이 부족했던 옛날일수록 기우제는 많을 수 밖에 없었고, 그것은 전국적으로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농민의 생사를 좌우하는 것이 농사이고, 그 농사를 좌우하는 것이 바로 비였기 때문에 기우제에는 가능한 모든 방법이 동원되어 왔다.

그러한 비에 대한 관심은 단군신화의 환웅이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를 거느리고 내려 왔다는 기록에서부터 보인다. 삼국시대에는 삼국이 각각 시조묘·명산대천 등에 기우제를 올렸던 기록들이 『삼국사기』에 보인다.


기우제 나름의 독특한 방법들

(1) 산상분화(山上焚火) 제관들이나 마을사람들이 장작·솔가지·시초(柴草) 등을 산 위에 산더미처럼 쌓고 불을 지른다.

흔히 군(郡)에서 주최하여 수십 개 마을이 밤중에 같이 하므로 대단한 장관을 이루기도 하였다. 이렇게 하는 까닭으로는 기원을 천신께 알리기 위해서라든가, 천신이 오르내리는 길을 밝힌다든가, 양기(陽氣)인 불로 음기인 비구름을 부른다는 등의 이유가 전해져 오나, 대개 옛 관습을 따른 것이다.

기압의 변화가 적은 밤중 고기압에 덥혀진 저기압의 충격이 비구름을 형성시킬 수 있으리라는 논의도 있다.

(2) 물병 거꾸로 매달기와 물긷기 기우제 기간 중 마을사람들이 각기 자기집 처마 끝에 버들가지나 솔가지로 마개를 한 물병을 거꾸로 매단다.

이것은 낙수가 떨어지는 듯한 유사주술행위(類似呪術行爲)로, 유사한 현상은 유사한 결과를 낳는다는 원초적 심성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또 부인들이 강물을 키[箕]에 퍼서 머리에 이고 온몸을 적신 채 뭍으로 오르내리기를 되풀이한다. 이것도 위와 같은 유사주술행위로 보인다.

또 부인들이 각자 물동이에 강물을 길어 산 위의 기우제장에 가서 절을 하고 쏟아 버리기도 한다.

(3) 시장 옮기기 삼국·고려·조선시대에 모두 기록이 있는 오랜 전통이다. 비가 내릴 때까지는 옮긴 장터에서 계속 장을 벌인다. 원시장터에는 무당을 모으거나 흙으로 큰 용을 빚어서 기우제를 계속 지내는 곳도 있었다.

그런데 조선 초기 한양(지금의 서울)의 경우는 원칙으로 시장을 종로에서 남쪽인 남대문이나 지금의 충무로 쪽으로 옮기는 동시에 남대문을 닫고 북문을 열었다.

이는 음기(陰氣)인 시장을 옮기면서 남문의 양기를 막고, 북문의 음기를 들이고 음기인 비구름을 맞으려는 음양설에 근거를 둔 주술적 신앙행위였던 것으로 보인다.

(4) 용제(龍祭) 삼국시대부터 전국 각지에서 성행하던 방법이다. 용을 그려 붙이기도 하고, 용을 만들어서 빌기도 하였다. 장소는 기우제장이나 장터이고, 용의 크기도 60㎝에서 20여m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몸뚱이는 통나무에 짚을 감고 흙을 바르고 청색으로 비늘을 그린 다음, 머리 쪽에서는 무당들이 굿을 하고, 몸뚱이 쪽에서는 판수들이 독경을 하고, 꼬리 쪽에서는 중들이 염불을 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비구름을 자유로이 부른다는 용의 영력이 발휘되기를 촉진, 강청하는 것이다.

(5) 줄다리기 줄다리기는 연중행사의 하나로 대개 정월대보름에 행해졌다. 그런데 이 줄을 용으로 인식하는 관념이 있었다. 그래서 줄다리기를 쌍룡상쟁(雙龍相爭)을 뜻하는 것으로 보아 비구름을 기대하는 것이다.

이긴 편에 강우와 풍년이 약속된다고 믿어, 가물었을 때에 줄다리기를 벌여 쌍방이 결사적으로 줄을 당기는 곳들이 있었다.

(6) 부정화(不淨化) 예로부터 오늘날에까지 계속 행해지는 전통적인 방법이다. 이것은 기우제장이나 용신이 있다고 전하는 용소(龍沼)·용연(龍淵) 등에 개를 잡아서 생피를 뿌리거나, 머리를 던져 넣어서 신성성을 더럽히는 것이다.

이 부정을 자취 없이 깨끗이 씻어내기 위하여 용신이 큰 비를 내린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한강이나 박연폭포에 용의 원수인 호랑이 머리를 넣었다는 기록들이 있다.

(7) 묘 파기 명산의 명당에 조상을 모시면 자손이 번창한다는 풍수신앙에서 유래한 방법이다. 예로부터 많은 마을들은 명산의 기슭에 자리를 잡고 그 생기를 고루 받으면서, 한 집안의 독점을 막는다는 관념이 있었다. 또 명산에 시체를 묻으면 부정을 씻을 수 없고 비가 안 내린다는 관념도 있었다.

그래서 가뭄이 계속되면 누가 몰래 암장(暗葬)한 것으로 알고, 산을 뒤져서 묘를 파내고 시체가 있으면 이것을 드러내 놓는다. 이것 또한 산신에게 비를 내리고 부정을 씻게 하려는 부정화의 방법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1970년대에 작성된 『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에서 보면, 이러한 기우제들이 거의 자취를 감추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작년 가뭄때 농업용수를 확보하려고 지자체까지 나서서 관정 개발, 간이 양수장 설치, 저수지 물 채우기 등 총력전을 폈으나 해갈에는 역부족이었다.

인공강우까지 성공한 인간이지만 변화무쌍한 자연현상에는 여전히 미약한 존재여서 하늘의 힘이라도 빌려보려고 안간힘을 쏟는다.

지자체 단체장 등이 주관하는 기우제는 바짝 마른 들녘에서 타들어 가는 농작물을 지켜보는 농민의 아픔을 위로하는 의미도 있다.

비를 염원하는 의식은 지역과 민족을 막론하고 농경사회에서는 거의 예외 없이 이뤄졌다. 동물을 제물로 바치고 기도하거나 산에 장작을 쌓아 연기를 피우는 방식이 흔했다. 물을 관장한다는 용을 괴롭히는 주술도 있었다.

세계 대부분 지역에서 기우 의식을 여성이 주관한다.

비를 내리는 하늘(남성)을 움직이는 것은 땅(여성)이라는 우주관이 여기에 깔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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