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세종=청주일보】김흥순 =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 투하된 핵폭탄에 부여된 코드명 리틀 보이 (Little Boy) 히로시마 원폭에 멈추어진 시간

윈스턴 처칠은 “분노한 신의 두번째 강림”이라 말했다

“오 하느님, 우리가 지금 무슨 일을 저질렀나이까?”

최초의 원폭공격기에서 진홍색 섬광을 본 에놀라이 게이 부조종사 로버트A 루이스 대위의 탄식이었다. 1945년 8월 6일 오전 2시45분 미국의 B29 폭격기 에놀라이 게이호는 태평양 매리애나 군도 티니안 섬에서 이륙했다. 에놀라이 게이호는 기장 폴 티베츠대령 어머니의 이름을 따서 명명했다.

‘항복 반대’한 일본 장교들의 반란(宮城事件)
하타나카 겐지 소좌 중심으로 쿠데타 미수 사건

1945년이 시작되면서 일본은 태평양전쟁에서 패색이 짙어 졌다. 일본은 6월말 수십만명의 인명이 잃으면서 오키나와를 미국에 빼앗겼다.

7월 26일 독일 포츠담에서 미국과 영국, 중국 정상이 모여 일본에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다.

8월 6일 히로시마에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원자폭탄 투하
8월 9일 소련군 참전, 나가사키에 또다시 원자탄 투하

남은 것은 항복밖에 없었다.
8월 9일 오전 도쿄 궁궐에서 열린 회의에서 스즈키 간타로(鈴木貫太郎) 총리를 비롯해 대신들은 나라를 유지하는 조건으로 항복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다음날인 10일 궁궐내 지하벙커에서 히로히토(裕仁) 천황이 참가한 가운데 열린 어전회의에서 총리는 천황의 결단을 내려줄 것을 요구했다.

어전회의에서 항복 건의가 나왔다는 소식이 육군성으로 흘러 나갔다. 나이든 장군들은 항복 이외에 대안이 없다고 받아들였지만, 소장파 장교들은 강하게 반발했다.

그중 하타나카 겐지(畑中 健二) 소좌가 주동이 되어 항복에 강하게 저항했다. 그는 동료 장교들을 규합했다.

8월 12일 밤, 하타나카를 중심으로 한 젊은 장교들은 아나미 고레치카(阿南惟幾) 육군대신을 찾아가 포츠담 선언을 받아들이지 말 것을 권유한다.

하지만 아나미는 젊은 장교들의 반역을 도와주겠다고 딱부러지게 대답하지 않는다. 하지만 젊은 장교들은 아나미가 자신들을 지지하고 있다고 믿고 쿠데타를 준비한다.

13일 밤 늦게 열린 어전회의는 그 다음날로 이어졌다. 이날 어전회의에서 천황은 항복을 결심한다. 이날 회의에서 아나미 육군대신은 끝까지 항복에 반대하는 의견을 개진했다.

14일 오전, 육군에 모든 고위장교들이 천황의 항복 결정에 동의하라는 칙령이 내려 왔다. 대부분 장교들이 서명했다.

하지만 젊은 장교들은 쿠데타를 해서라도 전쟁을 지속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궁궐을 접수해 천황의 육성녹음을 뺏아 방송에 나가지 못하도록 하고, 강경파 군부를 앞장세워 전쟁을 계속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황궁은 그날 저녁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근위대 병력을 추가 투입했다.

하타나카 소좌는 동부군관구 사령관 다나카 시즈이치(田中静壱) 대장에게 쿠데타 가담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타나카 등 주동자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동조자들을 찾아 다녔다.

14일 저녁 9시 30분. 하타나카를 중심으로 하는 소장파 반역자들은 칙령을 무력화하는 쿠데타에 돌입했다. 천황의 항복 선언이 방송되기까지 남은 시간은 14시간 정도.

그날 11시 30분 천황은 NHK 방송요원들을 궁궐로 불러 항복 녹음방송을 마쳤다. 시종장은 녹음테이프를 황후궁 사무실 금고에 보관했다.

하나타카 일행은 근위대 2연대장에게 아나미 육군대신이 동의했으므로 황궁의 문을 열라고 속였다. 황궁문이 열렸다.

날짜를 넘겨 15일 자정, 쿠데타군은 궁궐내로 진입했다.
새벽 한시쯤, 하타나카 소좌를 중심으로 한 쿠데타 세력은 근위 1사단 사령부를 방문해 모리 다케시(森赳) 사단장에게 쿠데타 가담을 요청했다. 모리는 목욕재계 후 신궁에 기도하고 와서 결정하겠다며 시간을 끌려 했다. 그러자 하타나카는 모리 소장을 권총으로 사살했다.

하타나카는 모리 사단장의 직인으로 위조명령을 내려 1사단 병력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황궁은 쿠데타군에 의해 완전 접수되었다. 궁궐 수비대는 무장해제되었고, 입구는 봉쇄되었다.

쿠데타군은 궁궐 곳곳을 뒤지며 천황의 녹음테이프를 수색했다. 하지만 미군의 폭격으로 궁궐에도 정전이 발생해 암흑천지였고, 테이프가 어디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비슷한 시각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에서 하타나카의 또다른 동조자 사사키 타케오가 이끄는 쿠데타군이 스스키 총리를 살해하기 위해 총리실로 향했다.

그들은 총리실을 기관총으로 무차별 난사했지만, 총리는 그곳에 없었다. 그들은 관저를 불태우고 히라루마 키치로 전 총리를 죽이러 찾아 다녔다.

한편 쿠데타군이 녹음테이프를 찾으러 다닐 때인 새벽 2시쯤, 쿠데타군의 대부격인 아나미 고레치카 육군대신은 자신의 관저에서 전통 사무라이 식으로 할복 자살했다. 아나미는 숨을 거두기 직전에 "한 번 죽음으로 대죄를 씻고, 일본은 멸망하지 않을 것을 확신한다"는 유서를 남겼다.

쿠데타군은 새벽 5시까지 테이프를 찾으려 헤멨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어둠이 걷히고 새벽이 찾아오자, 도쿄 일대를 관할하는 동부군관구 사령관 다나카 대장은 쿠데타군의 병력을 철수시키라고 요구했다.

이에 하타나카 소좌는 NHK 방송을 점령해 자신들의 뜻을 방송하고자 했지만, 방송인들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그들에게 방송을 허용하지 않았다.

아침 8시 쿠데타군은 거의 진압되고 해산했다.
근위 보병 제 2연대 병사들이 궁성에서 철수하자 천황의 녹음테이프는 무사히 NHK 스튜디오로 보내졌다.

쿠데타에 참여한 일부는 모든게 실패로 돌아가자 유인물을 만들어 도쿄 시내에서 시민들에게 뿌리며 항전의 정당성을 외쳤다. 하지만 아무도 그들에게 호응하지 않았다. 오전 11시, 하타나카 등은 권총자살하는 것으로 쿠데타는 끝났다. 일본에서는 이를 궁성사건(宮城事件)이라 부른다.

약 1시간 뒤 항복방송이 일본 전역에 울려 퍼졌다. 이로써 2차 세계대전은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우리나라도 해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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