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세종=청주일보】김흥순 = 2000년 6.15 공동선언이 합의된 이후, 처음으로 열린 이산가족 상봉과 함께 화제가 된 인물이 있습니다. 북에서 온 오영재 계관시인과 그의 동생 오형재 교수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형은 북한 최고의 영예인 김일성상 계관시인으로, 동생은 남한의 대학교수가 되어 첫 상봉의 시간을 가졌다.

안타깝게도 오영재 시인은 2011년에 갑상선 암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첫 이산가족 상봉이 있던 그날의 추억과 형에 대한 기억은 오형재 교수에게 고스란히 남아 있다.

사실, 오형재 교수는 이산가족의 문제와 아픔을 누구보다 절실하게 느끼며 살아온 사람입니다. 육군사관학교 교관 시절, 북으로 간 둘째 형 때문에 연좌제에 걸려 장교의 꿈을 포기하고, 지금의 서울시립대학 교수(전자계산학과)가 되었지만, 이후로도 연좌제의 굴레에 쉽게 벗어나지 못한 채, 오랜 시간을 이산가족이라는 아픔을 지니며 살아왔다.

때문에, 오형재 교수에게 이산가족 상봉은 매우 각별한 의미가 있다. 첫 상봉단에 포함되어 북에서 내려온 형은 살아생전 만날 수 없게 된 어머니의 소식을 듣고 눈물부터 흘렸다.

그토록 그리워하던 어머니에게 꼭 전하고 싶었던 말을 끝내 하지 못한 것입니다. 의용군 시절, 훈련소로 찾아온 어머니와의 마지막 만남 때문이다.

갓 돌 지난 막내 동생을 업고 30리 길을 걸어온 어머니에게 여기 왜 왔냐며 쌀쌀맞게 대했던 그날을 평생 잊지 못하고 있었다. 어머니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한 것을 죄스러워 했던 형의 모습을 회상하며 오형재 교수는 눈시울을 적셨다.

2000년 이산가족 첫 상봉 당시, 북에서 내려온 이산가족들은 북한에서 내로라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한마디로, 북에서 잘 나가는 사람들만 골라 보낸 것이죠. 훈련 프로그램을 통해 시험까지 치르게 했다는 이야기도 흘러나왔습니다. 북에서 온 이산가족들이 종묘를 구경할 당시, 소감을 묻는 질문에 서울의 공기가 좋지 않아 머리가 아프다는 기계적인 대답이 돌아왔지만, 오영재 시인의 대답은 달랐다.

"종묘의 매미 소리와 묘향산의 매미 소리가 같아서, 우리는 하나임을 느낀다."고 대답하며 시인다운 면모를 보여주었습니다.

남북한 민족문학작가들의 공동작품집 통일예술 1990 창간호. 특집 통일을 염원하며 북의 평론가가 남의 작품을 논한다.

1. 시대의 어둠과 시인의 고뇌, 김지하의 별밭을 우러르며, 박종식. 2. 투쟁의 진리와 민중의 힘을 보여주는 장편소설 들풀, 장형준. 3. 시인 고은의 백두산 제 1부와 그 주정에 대하여, 방연승.

4. 인간상의 예술적 추구와 작가의 문제의식, 1988년 이상문학상 수상 작품집 중에서, 오승련. 시. 문익환, 량덕모, 고은, 정서촌, 김지하, 이세방, 김남주, 박노혜, 백의선, 도종환, 박산운 외 24명. 소설. 류도희, 최일남, 람종상, 라종렬, 김명익. 평론. 통일운동과 문학, 백낙청. 역사의 주체인 민중의 생활과 투쟁, 김재용. 사회주의 소설과 여성해방, 오현주. 민중의 조국애와 투쟁의 형상화, 채호석. 인상기. 내가 만난 황석영, 홍석중. 회상기. 나의 발자욱, 오영재. 북한방문기. 무슨 노래 부르갓시요? 이길주. 평양의 공연예술, 김영희. 도서출판 광주.

북한에서는 시인도 계급이 주어 지는데, 시인 중에서 가장 높은 계급이 계관시인입니다. 북한의 시인들은 자유롭게 시를 발표할 수 없고, 당시 김일성 앞에서 먼저 발표한 후, 그 시가 인정을 받아야 세상에 나올 수 있었고, 시의 내용도 당원이 정해준 내용대로 시를 써야 했기 때문에 모든 분야를 공부하지 않으면 시를 쓸 수 없다.

오영재 시인은 모든 분야를 직접 경험하고 공부하며 시를 썼고, 계관시인까지 되었습니다. 그가 문인이 되기 전, 조립 공장에서 노동자로 일을 했던 경험 역시, 시를 쓸 수 있게 만든 힘이 됐다.

2000년 상봉 당시, 오영재 시인은 형제들에게 북으로 돌아갈 때, 잘하고 왔다는 소리를 들어야 된다며, 형을 보내줘서 감사하다는 내용의 연설문을 써달라고 부탁을 했다고 합니다. 당시, 오형재 교수를 포함해 큰 형과 남동생 모두 대학교의 교수직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그 부탁을 거절할 수 밖에 없었던 안타까운 일도 있다.

안타까운 일은 그뿐만이 아니고 이산가족 상봉의 시간이 끝나갈 즈음, 형에게 건넨 2천불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북에서 내려온 가족에게 전해줄 돈의 액수를 적십자에서 천불로 미리 정해 놓았기 때문에, 남한에서 준비한 천불을 형에게 건넸지만, 형은 막내 딸이 아프니 돈을 좀 더 줄 수 없겠냐고 부탁했고, 규칙을 어길 수 없어 망설이던 차에 2천불을 만들어서 몰래 주었다는 것이다.

교수의 가족들은 규칙을 어긴 것에 미안해하며, 그 사실을 조심스러워 합니다. 그런데, 북의 이산가족에게 건넨 돈의 액수가 평균 2,500불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형에게 돈을 더 주지 못한 것이 지금도 안타까운 일로 남아 있다고 했다.

상봉의 마지막 날, 가족들을 뒤로 하고 떠나야 하는 형은 아쉬움에 또다시 눈물을 흘리고 말았습니다. 그런 형에게 동생은 남북간 문인들의 모임을 주선해 보겠다며 위로했지만, 언제 다시 만나게 될지 모를 이산가족의 현실에 아쉬움은 쉽게 가라앉질 않았다.

오형재 교수는 형이 사랑했던 딸, 은아씨를 가장 보고 싶다고 말하며 조카가 보내준 귀한 반지를 선뜻 기증했다.

2008년 평양에서 열렸던 아리랑 축제를 보러 갔을 때에는 조카에 대한 그리운 마음이 더욱 간절해지기도 했었다며 비록 만난 적은 없지만, 미국과 일본을 통해 주고 받은 편지만으로도 조카에 대한 애정은 각별한 듯 했다.

오형재 교수는 이산가족의 문제가 정책에 반영되고, 온 국민의 관심과 애정 속에 이루어지기를 희망하고 있다.

이제 이산가족 1세대의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고령의 나이로 이미 많은 이산가족들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산가족은 남과 북이 하나의 민족이라는 것을 알리는 매개체 역할을 합니다. 이산가족이 줄어들면, 통일을 염원하는 간절함도 줄어들게 된다. 그것이 형이 가장 사랑했던 딸, 은아씨를 하루 빨리 만나야 하는 이유다.

(사진)상봉 당시 오영재 시인(가운데)과 오형재님(맨 오른쪽) 형제 사진

오영재님의 시 - 시인인 형님 오영재씨가 쓴 시

‘늙지 마시라
더 늙지 마시라, 어머니여
세월아. 가지 말라.
통일되어
우리 만나는 그날까지라도
이날까지 늙으신 것만도
이 가슴이 아픈데
세월아. 섰거라.

통일되어
우리 만나는 그날까지라도
너 기어이 가야 한다면
어머니 앞으로 흐르는 세월을
나에게 다오. 내 어머니 몫까지
한해에 두살씩 먹으리
검은빛 한오리 없이
내 백발 서둘러 온대도
어린날의 그때 처럼

어머니 품에 얼굴을 묻을 수 있다면
그 다음에
그 다음엔
내 죽어도 유한이 없으리니
통일 향해 가는 길에
가시밭에 피 흘려도 내 걸음 멈추기 않으리니.

어머니여
더 늙질 마시라.
세월아. 가지 말라.
통일되어
우리 서로 만나는 그날까지라도
오마니! 늙지 마시라,어머니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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