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세종=청주일보】김흥순 = "나라의 언로(言路)가 열리느냐 닫히느냐 하는 문제는 진실로 나라가 흥하고 망하는 중대사인데, 오늘날처럼 신하들의 간언(諫言)이 없었던 적은 없었다. 전해오는 말에 나라를 일으키는 왕은 간언을 잘하는 신하에게 상을 내린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간언하는 신하에게 상을 준 덕행은 없고 오히려 간언하는 신하를 죽였다는 이름만 얻었다. 언로가 열리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내가 왕위를 물려받은 이후로 단 한 명의 간관(諫官)도 죄를 물은 적이 없는데도 저 괴팍하고 귀신같은 무리들은 매번 간언을 할 기회를 만날 때마다 불평불만과 원망하는 마음을 품었다.

예전에는 윤약연과 한후익이 그랬고, 요즘에는 이택징과 이유백의 무리가 겉으로는 부지런히 애쓰는 척 말하면서 공공연히 어그러지고 방자한 계책을 부려 반역하려는 마음이 드러났다.

그럼에도 나는 한결같이 기쁘게 받아들여 죄를 묻지 않았다. 그러나 흉악한 죄가 드러나고, 반역의 행위가 점차 드러난 뒤에야 스스로 하늘의 꾸짖음을 받고 이어서 법의 처벌을 받게 되었다.

내가 비록 덕이 없다고 하지만, 어찌 한두 마디 귀에 거슬린 말을 했다는 이유로 역적으로 몰아 벌을 주었겠는가? 그런데 조정 밖의 여러 신하들은 이런 내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아무개는 어떤 상소를 올리고 또 다른 아무개는 어떤 말을 임금에게 아뢰었다가 법망에 걸려들어 큰 죄를 받았다.

이것은 앞서 처벌받은 사람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말라는 경계다."라고 말한다. 이 어찌 안타깝고 통탄할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은 까닭으로 '언로(言路)'라는 두 글자는 지금 시대가 꺼리는 말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말(語)이 임금이 타는 수레에 다다르면 서로 돌아보고 놀라면서, 몸에 재앙을 입힌다고 여긴다.

이 때문에 나 역시 근심하고 두렵게 여겨 쉽게 신하들에게 간언하라고 하지 못하고 있다.

'상궁지계(傷弓之戒, 화살을 맞은 적이 있는 새는 활시위 당기는 소리만 듣고도 떨어진다는 뜻)'는 참으로 고통스러운 교훈이지만, 모두 나 스스로 반성할 곳을 지적해 주니 누구를 탓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도저히 다스릴 수 없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세상에 어찌 말 없는 날이 있을 수 있겠는가?

최근에 '국조보감'을 강론한 적이 있는데, 뛰어난 신하와 명석한 재상들이 임금을 바로잡고 일으켜 세운 말들이 아직껏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감탄하게 할 뿐 아니라 종종 지금의 잘못과 딱 들어맞는 경우도 있었다.

뒤돌아 살펴보면, 지금 조정의 신하들 중에 옛사람들에게 미치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지혜롭고 충성스러우며 믿음이 두터워 서슴지 않고 간언할 수 있는 사람이 어찌 아주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멀리 떨어져 있거나 나와 관계가 서먹서먹한 신하는 법에 걸려들까 두려워 감히 말하지 못하고, 가까이 있거나 나와 관계가 친밀한 신하는 비위를 맞추느라 말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 외에 누가 내게 간언을 하겠는가? 지금 신하들이 내가 간언을 좋아하고, 간언하지 않는 신하들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안다면 반드시 이와 같이 어물거리고 있지 못할 것이다. 너(서용보) 또한 훗날 삼사(三司, 사헌부·사간원·홍문관)에 드나들 인재이니, 반드시 내가 마음을 열고 신하들에게 간언을 구하는 고민을 깊이 깨달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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