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세종=청주일보】김흥순 = 반구저기(反求諸己)와 가톨릭 '메아 쿨파'(Mea Culpa·내 탓이오) 정신

잘못을 자신에게서 찾는다
자왈 군자구제기요 소인구제인이니라(子曰 君子求諸己 小人求諸人) -논어, 위령공 제20장-

공자가 말했다. "군자는 책임을 자신에게서 찾고, 소인은 남에게서 찾는다."

이 구절은 앞서 나왔던 '자신을 책망하는 것을 후하게 하고 남을 책망하기를 박하게 하면 원망이 멀어진다'는 구절과 연관지어서 해석을 할 수도 있고, 다른 의미로 볼 수도 있다.

천주교평신도협의회에에서도 이 정신을 도입했었다.

지난 1988년 평신도의 날을 맞아 신뢰회복운동을 전개했다. 바로 ‘내 탓이오’ 운동이다. 1990년대 초, 당시 천주교 서울교구장이던 김수환 추기경도 자신의 승용차에 ‘내 탓이오’라고 적힌 스티커를 붙이면서 “자기를 먼저 돌아볼 때”라고 강조했다. 이 운동은 배부한 스티커 40만장이 금방 동 날 정도로 큰 호응과 반향을 얻었다.

'메아 쿨파'(Mea Culpa·내 탓이오) 정신이다.

자책은 리더의 숙명이다.

미국 스탠퍼드대의 로버트 서튼 교수는 최근 저서에서 진정한 리더는 위기상황에서 자책하는 모습을 보인다고 적고 있다. 책임에 소극적인 리더에게 진정한 변화는 기대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가톨릭 베네딕트수도회의 오랜 전통은 ‘쿨파’(죄라는 뜻)더

모두 모여 자신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자리다.

쿨파에 참여할 때마다 많은 부담이 있지만 마치고 나면 너무도 큰 마음의 위안을 얻고 나온다

“고백의 순간이 바로 용서하고 화해하는 순간”이다.

2004년 피오나 리를 비롯한 미시간대와 스탠퍼드대 연구팀은 최고경영자(CEO)의 태도와 기업 주가 사이의 연관성을 조사하여 ‘메아 쿨파’(Mea Culpa)라는 제목의 매우 흥미로운 논문을 발표했다.

이 구절은 짧지만, 해석하기가 은근히 까다롭다.

어떤 일이 잘못 되었을 때 남의 탓을 하지 않고 그 일이 잘못된 원인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아 고쳐 나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우임금의 아들 백계(伯啓)의 고사에서 유래되었다.

선비 정신 가운데 ‘행유부득 반구저기(行有不得 反求諸己)’라는 말이 있다.

행동을 해서 원하는 결과가 얻어지지 않는다면 자기 자신을 돌아보며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지난 일들을 돌아보는 것은 과거를 타산지석 삼아 잘한 것은 더욱 발전시키고 잘못은 더 이상 되풀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한 노력이다.

한 철학자는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과거를 돌아보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요즘 심심치 않게 다시 등장하는 지난 정권의 일들은 자기 방어를 위한 구차한 변명으로 사용되고 있어 이를 보는 국민들의 마음은 불편하다.

한마디로 너희들도 했는데 왜 우리는 못하냐는 것이다.

대학 교수들이 2007년 정해년(丁亥年) 새해 소망을 담은 사자성어로 ‘반구저기(反求諸己)’를 선정했었다.

맹자 공손추편 ‘發而不中 不怨勝己者 反求諸己而已(발이부중 불원승기자 반구저기이이)’에 나오는 글귀로 ‘활을 쏴 적중하지 않아도 나를 이기는 자를 원망하지 않고 돌이켜서 자기에서 찾을 따름이다’에서 나온 말이다.

맹자 〈이루 상〉편에도 "행하여도 얻지 못하거든 자기 자신에게서 잘못을 구할 것이니(行有不得者皆反求諸己), 자신의 몸이 바르면 천하가 돌아올 것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맹자도 공자도 자신에게서 문제점을 찾았다.

맹자는 ‘남을 사랑하는데 친해지지 않는다면 자신의 인자함을 돌아보고 남을 다스리는데 잘 안된다면 자신의 지혜를 돌아보라’는 ‘반구저기(反求諸己)’ 정신을 강조했다.

공자도 “군자는 자신을 먼저 돌아보고 소인은 남의 탓을 한다”고 지적했다.

선현들의 가르침에서 답을 찾아여 한다.

위의 사자성어에서 '諸'는 '모두', '무릇', '어조사' 등의 뜻 중 '어조사'라 쓰였는바, 이는 '지어(之於)'의 축약형으로 "~에 그것을"의 의미다.

諸:지어 저, 어조사 저 '諸(저)'의 용법

(1) 문장의 중간에 쓰일 경우 : ~에 그것을 <'之於'의 축약>
君子求諸己(군자구저기), 小人求諸人(소인구저인)
不若投諸江而忘之(불약투저강이망지)

(2) 문장의 끝에 쓰일 경우 : ~하였는가 ? <'之乎'의 축약>
一言而可以興邦(일언이가이흥방), 有諸(유저)

※ '諸(제)'의 다른 용법 (접두사)

諸君(제군), 不察耳(불찰이)
一日不念善(일일불념선), 諸惡皆自起(제악개자기)

반궁자문(反躬自問), 반궁자성(反躬自省)이라고도 하며, 우임금의 아들 백계(伯啓)로부터 유래된 고사성어다. 우임금이 하나라를 다스릴 때, 제후인 유호씨(有扈氏)가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왔다. 우임금은 아들 백계(伯啓)로 하여금 군대를 이끌고 가서 싸우게 하였으나 참패하였다.

백계의 부하들은 패배를 인정하지 못하여 다시 한 번 싸우자고 하였다. 그러나 백계는 "나는 유호씨에 비하여 병력이 적지 않고 근거지가 적지 않거늘 결국 패배하고 말았다. 이는 나의 덕행이 그보다 못하고, 부하를 가르치는 방법이 그보다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먼저 나 자신에게서 잘못을 찾아 고쳐 나가도록 하겠다"라고 말하고는 싸우지 않았다. 이후 백계는 더욱 분발하여 날마다 일찍 일어나 일을 하고 검소하게 생활하며, 백성을 아끼고 품덕이 있는 사람을 존중하였다.

이렇게 1년이 지나자 유호씨도 그 사정을 알고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결국에는 백계에게 감복하여 귀순하였다. 이로부터 반구저기는 어떤 일이 잘못 되었을 때 그 잘못의 원인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는 말로 사용되었다.

이 고사성어는 우리말의 '내탓이오'와 의미가 통하며, '잘 되면 제 탓, 못 되면 조상 탓'이라는 속담과는 상반된 뜻이다.

반구저기와 유사한 표현으로 나온 것이 위령공편의 자왈 군자구제기요 소인구제인이니라(子曰 君子求諸己 小人求諸人)다.

'구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가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구절로 나를 한 번 더 돌이켜 본다. 과연 나는 세상의 구하고자 하는 것을 나로부터 찾았는가, 아니면 남의 것에서 찾았는가?

우선 전자의 경우, '구한다'의 대상이 '문제의 원인' 혹은 '책임'이라고 보아 해석하는데, 이는 간단히 말해 군자는 내 탓이라 여기고 소인은 남 탓이라 여긴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문제가 생겼을 때 다른 사람의 잘못 혹은 주변 상황의 문제로 일이 엉망이 되었다 말한다. 어떤 일이 정말로 자신의 책임이 거의 없을지라도 일단 '내 탓이다'라고 하는 사람들은 좋게 보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모습을 통해 이 구절의 의미를 해석한 것이다.

'구하는' 대상이 '책임'만이 아니라 '삶의 진실' 혹은 '이익' 같은 걸로 볼 수도 있을 듯 하다. 군자는 자신을 살피고 성찰하여 삶을 충실하게 살고, 자신에게 걸맞는 것들만 취하려 한다.

소인은 남이 가진 것으로부터 기대거나 취하여 자신의 것인양 하는 경향이 있다. 이렇게 해석한다 해도 큰 무리는 없을 듯 하다.

군자는 잘잘못의 원인을 자기에게서 찾아 자기 자신을 반성하지만 소인은 그 반대다. 이 章은 자율적 인간의 존재방식을 간명하게 제시했다.

楊時(양시)
앞 장의 ‘君子는 病無能焉이요 不病人之不己知也니라’에 연결시켰다. 즉, 군자는 남이 알아주지 않음을 병으로 여기지 않지만 종신토록 이름이 일컬어지지 않음을 싫어하며 종신토록 이름이 일컬어지지 않음을 싫어하지만 원인을 찾는 것은 자기 몸에 돌이켜 할 뿐이라고 했다.

諸(저)는 之와 於를 합한 글자다.
求諸己는 모든 일을 자기 책임으로 삼는 것,
求諸人은 나쁜 일을 남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정약용은 求諸己를 ‘仁의 단초를 자기에게서 찾음’으로 보고 이 章을 ‘顔淵(안연)’의 克己復禮章(극기복례장)에 연결시켰다.

공자는 克己復禮가 仁이라 말하고는 ‘爲仁(위인)이 由己(유기)니 而由人乎哉(이유인호재)아’라고 했다. 그 ‘인을 행함이 자기로부터 말미암는 것이지, 남으로부터 말미암겠는가’의 뜻이 求諸己와 같다고 본 것이다. 일설로서 갖추어 둘 만하다.

‘중용’
선비들이 활쏘기에서 正鵠(정곡)을 맞히지 못하면 원인을 자기에게서 찾는 일이 군자답다고 했다. 군자의 求諸己를 활쏘기에 비유한 것이다. ‘맹자’는 남을 사랑하는 데도 그가 나와 친해지지 않으면 자신의 仁을 돌이켜 보고, 남을 다스리는 데도 그가 제대로 다스려지지 않으면 자신의 智를 돌이켜 보며, 남을 禮로 대하는 데도 그가 예로 답하지 않으면 자신의 敬을 돌이켜 보라고 했다.

‘反求諸己’는 병적인 自責(자책)이 아니다. 최한기는 反求諸己하는 데에도 過不及의 병폐가 있으니 주의하라고 지적했다. 求諸己한다면서 증험할 수 없는 일에 심력을 쏟아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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