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일보】 김흥순  = 1905년 11월 17일 마음속 조기를 달아야 할 을사늑약 체결일-을씨년스럽다

오늘이 우리가 가끔 사용하는 을씨년스럽다의 어원이 생긴 을사늑약 체결일이다.

을씨년은 '을사년(乙巳年)'이 변해 생긴 말이다.

을사년(1905년)은 우리나라가 강제로 외교권을 빼앗기고 통감정치가 실시된 해다.

당시는 일본이 청일전쟁을 통해 청국을 굴복시키고 러일전쟁을 통해 러시아를 굴복시킨 연후에 영국하고 영일동맹을 통해 우호협력 관계를 맺고 미국하고는 데프트-가쓰라 밀약을 통해 미국이 필라핀을 차지하는 대신 일본은 한국을 차지한다는 국제밀약 관계를 통해 한반도를 집어삼켰던 시기다.

을사5조약, 을사조약이 아니고 을사늑약이다.

조약이라고 하면 국제법상으로나 국제 관습법상 상대 국가끼리 동등한 대화를 통해서 맺어지는 것이 조약인데 을사늑약은 강압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을사늑약으로 불러야 한다.

개인간 계약도 공평한 입장에서 이루어져야 되는데 국가간에 그것도 대한제국의 운명을 맡기는 국제조약을 강박에 의해 맺어졌다는 것은 조약으로 부를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늑약이라고 해야 마땅하고 그 때 당시 황성신문이나 대한매일신보 이런 데서는 늑해라고 불렀습니다. 강압에 의해 맺어진 조약이라고 늑해, 또는 늑약이라 불렀다.

이것은 무효다.

오늘의 어떤 선언이나 자료가 후일에 사료가 된다.

우리가 을사늑약을 무효라고 선언하지 않으면 그것은 유효하다고 인정하는 꼴밖에 안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라도 우리가 그것을 무효로 선언해야 한다. 2005년 7월달에 남북 장관급 회담에서 무효라고 확인을 했다.

우리가 무효라고 선언하기 전에 이미 1906년 그러니까 을사늑약이 맺어졌던 그 이듬해, 프랑스 국제법 학자였던 프란시스 레이라는 사람이 이것은 강박에 의해 이뤄진 것이기 때문에 무효라고 이미 선언을 한 바가 있다.

일제시대 때입니다만 하버드 대학의 국제법위원회, 1963년 유엔 국제법 인권위원회 이런 데서도 강박에 의해 이뤄진 대표적 조약의 하나로 을사늑약을 들었다.

한국만 이런 것들을 까맣게 모르거나 침묵해 왔다.

당시 이완용 등 '을사오적'을 성토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이완용 등은 고종 황제를 찾아가 변명한다.

'신들이 요즘 상소들을 보았는데… 이것은 오늘 처음으로 이루어진 조약이 아닙니다. 그 원인은 지난해에 이루어진 의정서와 협정서에 있고… 국내에 진실로 충성스럽고 정의로운 마음을 가진 자들이 있다면 마땅히 그 때에 쟁집(爭執)했어야 했고 쟁집해도 안 되면 들고일어났어야 했으며, 들고일어나도 안 되면 죽어버렸어야 했을 것인데 일찍이 이런 의거를 한 자를 한 사람도 보지 못하였습니다.'(조선왕조실록)

망국의 원흉들이 그에 의분을 참지 못하는 이들을 두고 '정 억울하면 죽기라도 했어야지'라며 비아냥대고 있다.

그러나 이완용 등은 틀렸다.

최근 한 수집가가 공개한 화보가 있다. 1905년 12월 8일 일본에서 간행된 것인데, 갓 쓴 한 조선인이 지나는 기차를 향해 돌을 던지는 그림이다.

'가소로운 조선인의 폭행'이라는 제목에 부연 설명이 붙어있다. '11월 22일, 이토 대사가… 탑승한 기차가 영등포 정거장 부근에 접어들자, 한국의 폭도 한 명이 열차를 향해 돌을 던졌는데 겨우 유리창을 깼을 뿐으로… 체포하고 보니 우매한 농민으로서… 술에 취해 아무 생각 없이 돌을 던졌다고 한다.'

돌을 던진 이는 원태우(1882~1950)다.

하지만 그는 아무 생각 없이 돌을 던진 것이 아니었다. 원태우는 뚜렷하게 이토 히로부미를 응징하려는 뜻을 가지고 의거했으나 동료의 배신으로 실패했다. 일본으로서는 애써 의미를 축소시키려 했음이다.

어디 원태우뿐이었으랴. 을사늑약 전후로 많은 이들이 들고 일어났고, 이름 없이 죽음을 무릅쓴 이도 많았다. 11월 17일은 을사늑약 체결일이자 순국선열의 날. 그들을 기억해야 한다.

안양역에 오르다 보면 왼쪽에 있는 부조는 이토히루부미 저격1호 원태우 의사의 기념부조가 보인다.

원태우는 임오군란이 일어났던 1882년 3월 4일 안양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원태근으로도 불렸다. 을사늑약이 체결되던 당시 23세 나이였던 원태우는 이토 히로부미가 수원에서 사냥을 하고 그곳에서 기차로 안양을 거쳐 서울로 이동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날은 11월 22일로 을사늑약이 체결되던 11월 17일로부터 닷새가 지난 날이었다. 전 민족의 울분과 분노가 천지를 진동하던 때였다. 원태우는 동리 친구 이만려, 김장성, 남통봉과 거사를 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들은 선로에 커다란 돌들을 깔아 기차를 전복시키려는 계획을 세웠다. 거사 장소는 서리재로 오늘날 관악 전철역에서 서울 방면으로 약 400미터 지점인 안양 육교 아래였다.

그들은 저녁 무렵인 오후 6시경 어둠을 이용해 큰 돌들을 선로에 깔고 이토가 탄 기차를 기다렸다. 계획대로라면 곧 이토가 탄 철도는 6시 15분 경 이곳을 지날 것이고, 기차는 선로에 깔아놓은 돌들로 인해 그대로 선로를 이탈해 공중으로 치솟아 전복할 것이었고, 이토는 죽거나 큰 부상을 입을 것이 분명하였다.

초조하게 기다리기 몇 분이 지났을까?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기차가 다가올 시간이 되기 직전 친구 이만려가 목숨을 건 이 거사에 겁을 먹고, 갑자기 뛰어 내려가더니 선로에 깔아놓은 돌들을 다 치워버렸다.

당황한 원태우는 다시 돌을 깔려고 했으나 이미 기차가 시야에 들어오는 상황이라 시간이 허락되지 않았다. 결국 일행들이 도망을 하는 가운데 원태우는 단독 거사를 결심하는데, 짱돌로 이토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당시 열차의 속도는 시속 20∼30킬로미터 내외로 오늘날처럼 그렇게 빠르지도 않았고, 원태우가 위치한 곳은 약간 높은 비탈길이었으므로, 그 아래 선로로 달리는 기차를 공격하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기차 창문 안에 이토로 보이는 인물이 보이자 원태우는 분노의 마음으로 그를 향해 짱돌을 힘껏 던졌다. 창문이 깨지고 그 창문 파편이 이토의 얼굴 여덟 군데에 박혔다. 이토가 뇌진탕을 당했다는 기록도 있으나 실제로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이토 일행은 크게 놀랐고, 기차는 응급처지를 위해 한 시간 이상 멈춰 섰다. 사건 직후 원태우 지사와 동료들은 안양역에서 일하던 철도 노무자의 제보로 잡혔다.

이튿날 전보를 통해 이토 피습사건이 일본에 알려지면서 일본 증시가 한때 폭락하기도 했다. 『일로전쟁 화보집』에 실린 것처럼 대수롭지 않은 사건은 아니었던 것이다. 게다가 술 취한 우매한 농민의 우발적인 행동은 더더욱 아니었다.

일본에게 외교권을 빼앗긴 당시 대한제국 정부는 이 사건을 접하고 즉시 사과 서신을 이토에게 보내고, 사건 책임을 물어 시흥군수를 파직하고, 경기도 관찰사를 견책 처분하였다.

이후 원 의사는 징역 2개월에 곤장 1백대의 처벌을 받고 이듬해 1월 석방되었다. 사건에 비해 약한 처벌 수위였다. 이는 원 의사에 대한 가혹한 처벌로 한국인들이 자극받을 것을 우려한 이토가 처벌 수위를 낮추도록 지시한 결과였다.

당시는 민영환, 조병세의 자결, 을사의병의 발발, 학생들의 동맹 휴업, 상인들의 철시 투쟁 등 을사늑약에 대한 한국인의 저항이 강렬할 때였다.

석방된 원 의사는 가혹한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평생 고통을 받았으며, 결혼을 하지 않은 독신으로 평생 살다가 1950년 한국전쟁 중 타계했다. 당시 그의 나이 69세였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1990년 8월 15일 노태우 정부는 원태우 의사의 의거 85주년이자 원 의사 서거 40주년을 맞이하여 원 의사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그 후 평촌 자유공원에 원 의사의 동상이 세워지고, 짱돌을 던진 곳에 표지석이 설치되고, 안양역 계단 벽면에 원 의사의 부조 조형물이 새겨지는 등 그의 뜻을 기리는 각종 기념물이 조성되었다.

한국인의 이토 공격 1호로 기록될 이 사건은 비록 실패하고 말았지만, 원태우 의사의 의기는 안중근 의사 못지않았다. 만약 원태우 지사의 의거가 성공하여 이토가 죽었다면 우리가 아는 안중근 의사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즉 을사늑약으로 일본의 속국이 되었으므로 을사년은 민중들에게 가장 치욕스러운 해인 것이다.그래서 마음이나 날씨가 어수선하고 흐릴 때 '을사년스럽다'고 하던 것이 지금의 '을씨년스럽다'로 변했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 체결일

1905년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압하여 체결한 조약으로, 외교권 박탈과 통감부 설치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이 조약으로 대한제국은 명목상으로는 일본의 보호국이나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1905년 11월 17일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가 위해 강제로 조약을 맺은 날이다.1905년 11월 17일, 일본이 대한제국(大韓帝國, 이하 한국)을 강압해 체결한 조약으로 공식명칭은 한일협상조약(韓日協商條約)이다.

1904년 8월 22일에 재정(財政)과 외교(外交) 부문에 일본이 추천하는 고문(顧問)을 둔다는 내용으로 체결된 ‘외국인용빙협정(外國人傭聘協定, 제1차 한일협약)’과 구분하여 ‘제2차 한일협약(第二次 韓日協約)’이라고도 불린다.

‘을사(乙巳)’라는 명칭은 1905년의 간지(干支)에서 비롯되었으며, 명목상으로 한국이 일본의 보호국(保護國)으로 되어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이라고도 불렸다.

하지만 보호국이라는 지위가 사실상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화(植民地化)를 미화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되어 ‘을사조약’이라는 명칭이 흔히 사용된다.

모두 5개의 조항으로 이루어져 ‘을사오조약(乙巳五條約)’이라고도 불리며, 조약 체결 과정의 강압성(强壓性)을 비판하는 뜻에서 ‘을사늑약(乙巳勒約)’이라 부르기도 한다.

모두 5개조의 항목으로 되어 있는데, 그 주요 내용은 한국의 식민화를 위해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統監府)와 이사청(理事廳)을 두어 내정(內政)을 장악하는 데 있다. 조약의 체결로 대한제국은 명목상으로는 보호국이나 사실상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가 되었다.

을사조약을 기초로 개항장과 13개의 주요 도시에 이사청이, 11개의 도시에 지청(支廳)이 설치되어 일본의 식민지 지배의 기초가 마련되었으며, 통감부는 병력 동원권과 시정 감독권 등을 보유한 최고 권력 기관으로 군림하였다.

을사조약에 대한 반대투쟁도 각지에서 활발히 벌어졌다. 이한응(李漢應)은 제1차 한일협약 이후 강대국들이 일제의 이익을 대변하며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데 항의하다가 자결하여 애국운동에 영향을 끼쳤다.

이후 민영환(閉泳煥), 조병세(趙秉世), 홍만식(洪萬植), 이상철(李相哲), 김봉학(金奉學), 등은 을사조약 체결에 죽음으로 항거하였으며, 민종식(閔宗植), 최익현(崔益鉉), 신돌석(申乭石), 유인석(柳麟錫) 등은 일본에 저항하는 의병(義兵)을 일으켰다. 헤이그에 밀사(密使)를 파견하는 등 을사조약이 강압에 의한 무효임을 알리는 외교 활동도 전개되었다.

을사오적(乙巳五賊)

박제순(朴齊純, 외부대신),

이지용(李址鎔, 내부대신),

이근택(李根澤, 군부대신),

이완용(李完用, 학부대신),

권중현(權重顯, 농상부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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