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일보】 청주일보 = 1835년 11월 25일 태어난 악덕자본가에서 자선사업가로 변신한 철강왕 앤드류 카네기(Andrew Carnegie)

앤드류 카네기는 철강 산업의 아버지이며 위대한 기부가다. 그는 학교를 4년 밖에 다니지 못했지만 어느 누구 보다도 식견이 높았으며 특히 철강업에 대한 그의 지식은 매우 뛰어났다.

카네기는 영국의 스코트랜드 던펌린에서 직조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카네기가 살고 있는 덤퍼린은 직조기술자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그중에서도 카네기 아버지는 매우 솜씨 좋은 직조공이었다.

아버지가 어느 날 해고당하자 미국 이민을 결심했다. 미국에 도착했지만 그리 현실이 만만치 않았다. 그는 집안에 도움을 주기위해 직조 공장직원, 전보 배달원, 전신기사 등의 일을 하며 성장기를 보냈다.

카네기는 전보 배달원으로 일하면서 틈틈이 모스 부호을 익혔다. 카네기는 모스 부호가 도착하는 신호음만으로도 내용을 해독할 수 있었다. 전신기사들도 종이에 새기는 모스 부호나 해석할 수 있었다.

카네기는 키가 150CM 밖에 되지 않았다. 물리적인 키는 작았지만 마음의 키는 누구보다도 높았다. 그는 여러 직업을 전전한 끝에 철강산업에 뛰어들었다.

철강산업에 뛰어든 카네기가 직면한 첫 번째 난관은 철로 바꾼 기찻길이 녹아버린 것이었다. 철은 나무보다 더 단단했으나 서너달만 지나면 녹아버리는 약점이 있었다. 카네기는 고민을 거듭하다 철보다 강한 것을 찾았다. 그것은 강철이었다. 카네기는 영국의 기술자 헨리 베세머가 개발한 강철을 만드는 방법을 활용해 강철을 생산했다. 이 튼튼한 강철은 세상을 바꾸기 시작했다.

선박, 철도, 가스관, 엘리베이터, 건물, 교량 등등 많은 산업 분야에서 혁명적인 변화가 시작됐다. 카네기는 강철을 개발할 당시 주변으로부터 많은 비웃음을 당했다. 강철은 가격이 비싼 재료 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네기는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자신의 계획을 어김없이 실천했다.

새로운 세계를 개척하려는 의지가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이렇듯 자수성가를 통해 성공시대를 연 카네기는 자신에게도 엄격했지만 직원들에게도 매우 엄한 사람이었다.

초기에 그는 직원의 작은 실수도 용납지 않고 가차없이 책임을 물었다.

하지만 카네기는 회사 월급을 잃어버린 뻔한 실수를 경험했다. 그 일을 계기로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고 너그러운 상사가 됐다. 그를 너그러운 상사로 만드는 계기가 또 한번 있었다.노동자들이 목숨을 걸고 벌인 홈스테드 철강소 파업은 카네기에 인생에 큰 변화를 줬다.

자신의 부와 성공이 노동자들의 땀과 피로 이뤄진 것이라 것을 느꼈다. 그후 그는 노동자들을 단순히 일꾼이 아니라 인생의 동료로 여기게 됐다.

이러한 변화는 카네기의 제 2인생을 여는 계기가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자선과 기부의 제왕 카네기는 이때 탄생한다. 그는 자선사업을 벌여 자신의 번 부를 사회에 환원하기로 결심한다. 67살에 은퇴한 카네기는 도움이 필요한 곳에 아낌없이 기부를 하면서 여생을 보낸다.

카네기는 교육과 문화 사업에 특히 많은 기여를 했다. 석유 부호 록펠러에 버금가는 자선과 기부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의 대상이 된다. 카네기의 기부활동은 실로 눈부시다 하겠다.

그는 구제기금으로 노동자들을 돕고 도서관을 선물했다.

독학으로 배움을 채운 그는 책에 대한 고마움을 항상 잊지 않고 살았다. 그는 미국 전역은 물론 뉴질랜드와 태평양 남부까지 전 세계에 2800개 곳에 도서관을 세웠다.

독실한 기독교인인 그는 파이프 오르간을 미국에만 5천개 전세계에 3천개를 기부했다. 카네기는 사람들이 교회에서 마음의 안식을 얻기 바라는 마음으로 파이프 오르간을 기부한 것이다.

그는 교육사업에도 ,문화예술 사업에도 자신의 돈을 기부했다. 남북전쟁을 통해 피눈물을 흘려본 경험이 있는 그는 전쟁을 반대하는 활동에도 앞장선다. 그는 국제평화기금을 만들었는데 국제연합안에 국제사법재판소가 만들어지는 계기가 됐다.

심한 폐렴을 앓던 카네기는 85세 나이로 눈을 감았다. 그는 은퇴를 선언한 67세부터 죽을 때까지 무려 50조원을 사회에 환원했다. "자기보다 현명한 사람들을 모이게 하는 법을 터득한 자 여기에 잠들다"는 묘비명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같은 그의 삶에 바치는 헌사였다.

20세기 말에 기업 인수 합병 붐이 일기 전까지만 해도, 역사상 가장 대규모의 기업 인수 합병은 1901년에 있었던 유에스 스틸의 설립이었다. 당대의 거물 은행가 J. P. 모건이 세계 최초 자본금 10억 달러 이상 규모로 조성한 이 트러스트의 핵심은 이른바 ‘강철왕’으로 유명한 앤드류 카네기의 회사였다.

당시 미국 최대 철강 회사의 소유주였던 카네기는 은퇴를 고려하던 중이었고, 모건의 회사 매각 제안을 숙고한 끝에 4억 8천만 달러를 가격으로 제안했다. 이를 흔쾌히 받아들인 모건은 거래를 성사시킨 직후에 카네기에게 이렇게 말했다. “카네기 씨,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 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이민자 출신 소년 직공, 철도회사를 거쳐 강철왕이 되다

앤드류 카네기는 1835년 11월 25일, 스코틀랜드의 던펌린에서 태어났다. 직조공이었던 그의 부친은 수동식 직조기를 이용하는 작은 가내 공장을 운영했는데, 1847년에 증기식 직조기가 도입되면서 하루아침에 생계가 어려워지고 말았다.

급격히 가세가 기울면서 앤드류는 일찌감치 세상 물정에 눈뜨게 되었고,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어서 돈을 벌어 가난을 벗어나야겠다고 결심했다.

이듬해 1848년에 카네기 일가는 결국 고향을 떠나 이민선에 몸을 실었고, 미국에 도착해서는 친척이 사는 펜실베이니아 주 피츠버그 인근에 정착했다. 당시 13세였던 앤드류는 주급 1달러 20센트를 받고 면직물 공장에 들어가 일했으며, 다른 공장으로 자리를 옮긴 뒤에는 운 좋게 공장주의 눈에 들어 사무 보조도 담당한다.

학력이라곤 던펌린 시절 초등학교를 다닌 것이 전부였지만, 사회생활 초기에 카네기는 남다른 근면과 성실을 발휘하여 상사의 호감을 샀으며, 간혹 찾아오는 행운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최대한 이용했다.

가령 전신국에 전보 배달원으로 취직하자마자 어깨너머로 전신 업무를 익혀 두었다가, 담당자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능숙하게 업무를 대신해 상사에게 인정받고 정식 전신기사가 된 사례가 대표적이었다.

1853년에 카네기는 전신국의 단골손님인 펜실베이니아 철도회사의 피츠버그 지부장 토머스 스콧에게 스카우트된다. 스콧은 철도 업무뿐만 아니라 투자에 관해서도 조언하는 등, 카네기에게 더 큰 기회로 통하는 문을 열어준 일생일대의 은인이었다. 1855년에 부친이 사망하자 앤드류 카네기는 20세에 집안의 가장이 되었다.

1856년에는 우연한 기회에 철도 침대차 사업에 투자해 처음으로 거금을 벌어들인다. 217달러 50센트를 대출받아 투자한 결과, 불과 2년 만에 매년 5천 달러의 배당금이 나올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두었던 것이다.

1859년에 카네기는 스콧의 뒤를 이어 펜실베이니아 철도회사의 피츠버그 지부장으로 승진했고, 이때부터는 제법 재산을 모아 부유층으로 행세할 수 있었다. 1861년에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카네기는 전쟁부에서 일하던 스콧을 따라 워싱턴으로 향했고, 자기 분야에서의 경험을 살려 철도와 전신의 복구 업무를 담당한다.

이듬해에는 무려 14년 만에 어머니와 함께 고향 던펌린을 방문하고 감회에 젖는다. 그 즈음 카네기는 미국 석유산업 초기의 산유지로 유명한 타이터스빌의 석유회사에 거금을 투자해서 막대한 이득을 얻었고, 이는 훗날 그가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하는 밑천이 되었다.

1863년에 카네기는 키스톤 교량 회사를 공동 설립함으로써 철강 분야에 처음으로 뛰어든다. 30세 때인 1865년에는 자기 사업에 전념하기 위해 12년간 몸담았던 펜실베이니아 철도 회사에서 퇴직했다.

1867년에는 유니온 제철소, 1870년에는 루시 용광로 회사를 연이어 설립하며 사업의 폭을 넓혔다. 1872년에 영국의 헨리 베세머 제강소를 방문한 카네기는 그곳에서 독특한 방법으로 생산되는 강철의 놀라운 잠재력을 깨닫게 되었다. 당시에 주로 사용되던 선철은 제조가 쉬운 대신에 수명이 짧았던 반면, 강철은 선철보다 수명이 긴 반면에 제조 과정이 복잡했다.

카네기가 훗날 ‘강철왕’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 까닭은 미국에서 강철의 대량 제조 및 유통을 실현시켰기 때문이다. 남북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미국은 대부분의 철을 외국에서 수입했지만, 이후로는 수요가 급증해서 철강 사업의 미래가 밝았다.

카네기는 1875년에 미국 최초의 강철 공장인 에드거 톰슨 강철 회사를 설립했고, 이 과감한 투자는 곧바로 큰 성공으로 이어졌다. 이후 카네기는 안정적인 원료 공급과 생산 및 유통을 위해 관련 업체를 연이어 합병하거나 매입했다. 가령 1881년의 프릭 코크스 회사 합병, 1886년의 홈스테드 제강소 매입 등이 대표적 사례였다.

1902년 1월 29일 당시로 천문학적 액수인 2천5백만 달러를 기부하여 공공도서관 건립을 지원하는 워싱턴 카네기협회를 설립했다.

미국 전역에 2500개의 도서관을 지었다. 카네기는 그밖에도 카네기회관, 카네기공과대학, 카네기교육진흥재단 등 교육·문화 분야에 3억 달러 이상을 기증했다.

현재 국제사법재판소의 건물인 평화궁을 지었다.

카네기 멜런 대학교를 설립했다. 사업 일선에서 은퇴한 카네기는 1919년 8월 11일 세상을 떠나기까지 18년간 자선사업에 몰두했다.

뉴욕에 900만 달러를 기부해 공공도서관을 세운 것을 시작으로 전 세계에 2509개의 도서관을 지었고 미국의 과학 발전을 위해 카네기 멜런 대학의 전신인 카네기 과학연구원과 기술원을 설립했는데 시카고 대학 등 12개 종합대학과 12개 단과대학을 지어 사회에 기증했다.

각종 문화예술 분야에 거액을 쾌척했다. 자신이 평생 모은 재산 90%가량에 이르는 3억5000만 달러를 사회에 환원, 그는 “많은 유산은 의타심과 나약함을 유발하고, 비창조적 삶을 살게 한다”는 이유에서 부의 대물림을 혐오했다.

저서

『앤드루 카네기 자서전』,

『부의 복음(The Gospel of Wealth)』,

『승리의 민주주의』,

『오늘의 문제』,

『사업의 왕국』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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