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일보】 김흥순  = 새롭게 보는 법학박사 '카사노바(Casanova, Giovanni Giacomo, 1725~1798)’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는 세워라!(Fiat Justitia Ruat Caelum)' -법대생들이 입학하는 순간부터 귀가 아프도록 듣는다는 라틴어 법언(法諺)이다.

법조인들이여, 부디 초심을 잃지 말라!

한국이 법률가들이 대통령이 되고 그들이 국회를 장악하고부터 나라가 시끄럽다.

"우리가 맨 먼저 할 일은 모든 법률가(변호사)를 죽이는 거야(The first thing we do, let's kill all the lawyers)."라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헨리 6세'가 생각나는 아침이다.

흔히 바람둥이나 호색한, 여자 신세 망치는 놈의 대명사는 '카사노바'와 '돈 후안'이다.

둘은 비슷하지만 명백한 차이가 있다.

카사노바는 실존 인물이지만 돈 후안은 스페인의 극작가 몰리나(Tirso de Molina,1571-1648)가 희곡“세빌리아의 엽색꾼과 석상의 손님(El Burldor de Servilla y Combidado de Piedra, 1630년)”에 등장시킨 작품속의 인물이다.

실제모델이 있지 않다.

이탈리아 파두아 대학에서 17세에 법학박사 학위를 받은 이탈리아 문필가, 외교관 '카사노바(Casanova, Giovanni Giacomo, 1725~1798)'는 이태리어, 불어, 라틴어에 능통했던 인물이다.

그는 요즈음 애들말로 돈키호테다. (돈많고 키크고 잘 생기고 테크닉 좋은)남자였다.

카사노바는 평생 수백명의 여성과 잠자리를 가졌다고 알려져 있다.

2m에 육박하는 큰 키와 거구를 자랑한데다 몸에 좋은 음식으로 체력을 증진했다고 한다.

지식도 풍부했다. 그가 쓴 <<내 생애의 역사>> 회상록(12권)은 18세기 유럽의 풍속과 문화를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다.

1755년, 여자를 유혹하는 기술이 ‘악마의 속삭임’이라며 마법사라는 죄명으로 종교재판에서 5년 징역형을 받고 파온비 감옥에 투옥되었다.

‘저술·출판·독서의 사회사’를 집필한 존 해밀턴 루이지애나주립대 교수는 ‘카사노바가 여자보다 책을 더 사랑했다’는 주장을 편다.

실제 책 때문에 위기에 빠진 그를 책이 구원한다.

파도바대에서 법학을 전공한 젊은 성직자였던 카사노바는 ‘외설적이고 이단적 책을 읽었다’는 이유로 재판도 없이 수감된 것이다.

‘성서’를 이용해 탈옥한 그는 ‘납이라 불리는 베네치아 감옥에서 탈출한 내력’이라는 제목의 책까지 냈다.

이후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를 이탈리아어로 번역한 그는 연극·문학 평론 잡지를 출간하는 등 책과의 인연을 계속 이어갔다.

그가 쓴 40여 권의 책 가운데는 ‘폴란드 사회 불안의 역사’ ‘철학자와 신학자’ ‘도덕·과학·예술에 관한 비판적 에세이’ ‘조지 왕조의 역법 개혁에 따른 공통 시간 측정에 관한 생각’, 5부작 유토피아 소설 ‘20일 이야기’ 등 진지한 주제가 많다.

노년의 카사노바가 체코 보헤미아의 둑스 성 도서관에서 사서(司書)로 일하며 마지막으로 쓴 책 ‘회고록’도 12권짜리 대작이었다.

벨기에 작가 리뉴 공은 “그가 무슨 말을 하든 계시가 되고, 무슨 생각을 하든 책이 된다”며 카사노바의 천재성을 부러워했다.

1960년대 무삭제 원본 ‘회고록’이 공식 출간되고 학자·예술가로서 카사노바의 업적이 재조명되면서 실추됐던 그의 명예도 회복되는 중이다.

이제 카사노바는 베네치아를 상징하는 아이콘이다.

그를 소재로 한 문화 예술 작품도 쏟아지고 있다. 카사노바에 관해 토론하고 연구하는 모임이 결성되고, 그를 추종하는 ‘카사노비스트’까지 출현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으로 그의 원고가 파손될까 염려했던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도 카사노바의 광팬이었다.

위선의 가면을 벗고 자신의 모든 것을 솔직하게 표현한 카사노바의 책들은 ‘18세기 유럽인의 삶과 문화를 날것 그대로 보여주는 귀한 사료’로서 역사적 가치가 크다.

2010년 프랑스 정부는 근대 유럽 상류층과 지식인의 공통어였던, 우아한 프랑스어로 쓰인 그의 ‘회고록’을 국보(國寶)급 문화재로 인정해 고가에 사들이기도 했다.

세인의 비판과 조롱이 쏟아져도 끝까지 당당했던 카사노바는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여인을 사랑했다. 하지만 내가 진정 사랑한 것은 자유였다.” 카사노바처럼 열정적으로 살고 싶은 현대인이 늘어나면서 ‘사랑과 예술의 유혹자’로서 그의 매력은 수백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21세기에 빛을 발하고 있다.

반면, 20세기를 대표하는 스타 학자로 최고의 영예를 누린 프로이트의 명성은 그의 사후에 무너지는 중이다.

결정타는 프랑스 철학자 미셸 옹프레가 날렸다.

‘우상의 추락’(2013)이라는 책에서 프로이트의 인간적 약점을 낱낱이 파헤쳐지며 거장의 인생은 너덜너덜해졌다.

이런 사태를 예견하고 불안했던지, 프로이트는 죽기 직전까지 문서를 파괴하고 자신의 행적을 지우려 애썼다. 하지만 그가 집필한 방대한 분량의 책들은 다행하게도 전 세계 도서관에 여전히 남아 있다.

프로이트는 ‘정신의 지도’를 그렸고, 카사노바는 ‘쾌락의 지도’를 남겼다.

카사노바는 1년 6개월간 복역하다가 극적으로 파온비 감옥을 탈옥했다.

정력에 좋다는 굴(Oyster)인 석화(石花)를 즐겨먹었다. 베네치아의 한복판에 플로리안(Florian)이라는 카페가 있다.

플로리안은 1720년에 개업한 세계 최초의 카페로 유명하다. 플로리안은 여성도 출입이 가능해 남녀 사교장이었다.

당연히 당대 최고의 멋쟁이들이 드나들었음은 물론이다.

명성에 걸맞게 가격이 너무 비싼 게 흠이지만 에스프레소는 피할 수 없는 풍미를 가지고 있다. 플로리안은 역사상 최고의 호색한으로 유명한 자코모 카사노바가 수많은 여자들을 유혹한 장소로 유명하다.

카사노바는 지금도 유럽에서는 고가의 음식으로 쓰이는 생굴을 한 끼에 20개씩 먹었다고 한다. 굴의 주성분은 아연이다. 아연은 현대에 와서 정력의 근원으로 알려진 물질이다.

세계 최초로 피임용 콘돔을 사용했다.

그는 122명의 여성과 사랑을 나누었다고 천재적 바람둥이임을 그의 자서전에 밝히고 있다.

쾌락을 느끼는 감각의 촉수가 예민했던 카사노바는 요리·연애·사랑·도박·음악·미술·연극·과학·의학 등 다양한 분야를 섭렵했다.

이탈리아를 넘어 터키·영국·프랑스·스페인 등지를 여행하며 환락의 제국도 계속 확장해 나갔다. ‘즐겁게 보낸 시간은 절대 낭비가 아니었다.

인생의 권태로운 시간만 낭비일 뿐’이라는 소신을 몸소 실천하며 평생을 치열하게 살았다.

유럽 각지를 방랑하며 엽색(獵色)과 모험(冒險)을 즐긴 카사노바가 이탈리아 베네치아 사교계로 귀환했다.

화려한 언변으로 파온비 감옥의 탈옥 이야기를 하며 사교계의 스타가 된 카사노바는 인기를 바탕으로 루이15세의 애첩인 퐁파두르 부인에게 접근, 환심을 샀다.

1757년에는 루이15세를 알현했다.

그 당시 루이 15세는 프랑스의 재정적자로 인해 골머리를 앓고 있었는데 이때 카사노바는 프랑스의 국가위기를 극복할 방안을 왕에게 컨설팅 했다.

바로 복권(福券, Lottery)이었다.

카사노바의 제안에 따라 복권을 찍어낸 루이 15세는 손쉽게 재정 적자를 해결할 수가 있었다.

첫 복권 매출이 200만 프랑, 순이익은 60만 프랑이었다.

이를 계기로 루이 15세 왕의 신임을 얻은 카사노바는 프랑스 외무부 특사로 임명되었다.

그의 끊임없는 출세에 대한 욕망은 복권이라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실현해 프랑스 재정적자 문제를 해결한다.

미국도 도로와 항만 등 상당 부분의 인프라 확충이 복권제도에 의해 이루어졌다.

콜롬비아, 뉴저지, 예일, 하버드, 프린스턴 등 세계적인 명문 대학들도 복권을 통한 기금으로 설립할 수가 있었다.

복권의 역사는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역사학자들은 복권과 비슷한 방식의 추첨 게임이 이뤄진 유물을 근거로 고대 이집트 시대에 처음 복권이 등장한 것으로 보고 있다.

서양에서는 고대 로마시대부터 복권이 일반화되었다. 로마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복권 판매와 경품 추첨행사 등을 통해 로마의 복구 자금을 마련했다. 폭군으로 유명한 로마 황제 네로도 복권 형태의 추첨행사를 즐겼다.

동양에서는 기원전 100년경 중국 진나라에서 ‘키노’라는 복권게임이 국가적으로 시행되었다. 키노를 통해 마련된 기금은 만리장성 건립과 국방비 등에 사용되었다.

한국 복권의 기원은 조선 후기 유행했던 산통계(算筒契)에서 찾을 수 있다. 이름이나 숫자 등을 적은 알을 통에 넣어 흔든 뒤 밖으로 빠져나온 알에 따라 당첨을 결정하는 방식이었다.

한국 최초 복권은 1947년 12월 발행한 1948 런던 올림픽 참가비용을 모으기 위해 발행한 올림픽 후원권이 처음이다.

이때 액면가는 100원, 발행매수는 140만 매, 1등 당첨금은 100만원, 당첨자는 총 21명이었다. 이렇게 마련된 U$80,000로 런던 올림픽에 선수단이 참가했다.

그 후 복권은 가난한 정부가 경제 개발을 위한 자금이 필요할 때 수시로 발행됐다.

1949년 이재민 구호자금을 위해 발행된 후생복표가 대표적이다.

1950년에는 재정 자금을 만들기 위해 애국복권이 등장했다. 산업박람회 복표(1962년), 무역박람회 복표(1968년) 등 특정 행사를 지원하기 위한 복권이 뒤를 이었다.

지금처럼 정기적으로 꾸준히 발행되는 복권은 1969년 9월 한국주택은행이 발행한 주택복권이 도입되면서 등장했다.

당시 한국주택은행은 무주택 군경 유가족과 국가유공자, 베트남전쟁 파병 장병들의 주택 마련을 위해 주택복권을 발매했다. 주택복권은 월 1회 50만 장씩 장당 100원으로 처음에는 서울에서만 판매됐다.

서울의 집값이 약 200만 원이었던 1970년대 1등 당첨금 300만 원의 주택복권은 지금의 ‘로또복권’이나 ‘연금복권’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다.

1990년대에는 동전으로 긁어 그 자리에서 바로 당첨 여부를 확인하는 즉석복권이 인기를 끌었다. 대전국제무역박람회 개최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1990년 9월부터 3년간 발행된 엑스포복권이 첫 즉석복권이다.

체육복권, 기술복권, 복지복권 등이 그 뒤를 이으면서 1995년 전체 복권시장의 66%를 즉석복권이 차지했다.

복권의 인기가 높아지자 각종 복권기관이 난립하는 가운데 판매도 되지 않고 곧바로 폐기되는 복권도 나타났다. 2000년대 초까지 사라진 복권만 체육복권(1990년) 기술복권(1993년) 복지복권(1994년) 기업복권(1995년) 자치복권(1995년) 관광복권(1995년) 녹색복권(1999년) 플러스복권(2001년) 엔젤복권(2001년) 등 수십종에 달한다.

복권의 종류가 크게 늘자 정부는 구조조정에 나서 2004년 복권 및 복권 기금법을 시행해 복권 발행기관을 복권위원회로 단일화했다.

이에 따라 현재 기획재정부 복권위원회에서는 복권발행을 관리하고 있다.

1757년, 천하의 난봉꾼, 카사노바(Casanova, Giovanni Giacomo) 법학박사가 프랑스 루이 15세에게 복권 발행을 제안, 프랑스 경제난을 해결했다.

카사노바보다 못한 인간들이 설치는 한국의 법률자본주의 사회는 망조다.

법조인, 특히 판검사의 양심과 윤리 의식 회복이 선행되지 않고 세상의 모든 일은 백약이 무효다.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는 세워라!(Fiat Justitia Ruat Caelum)'

법대생들이 입학하는 순간부터 귀가 아프도록 듣는다는 라틴어 법언(法諺)에나 있는 죽은 단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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