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일보】 김흥순  = 의사, 한글연구가로 살다 친일 오점 남긴 송촌(松村) 지석영(池錫永) 죽은 날

지석영은 본관이 충주(忠州). 자는 공윤(公胤), 호는 송촌(松村)으로 1855년 5월 15일 서울 원동(지금의 낙원동)에서 지익용(池翼龍)의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송촌 지석영은 19세기 말 조선에 서양식 천연두 예방법인 ‘우두법’을 들여온 인물이다.

최초로 우두법을 개발한 영국 의사 에드워드 제너에 빗대 ‘조선의 제너’라 불린다.

그의 우두법은 조선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지석영은 한반도에 우두법을 소개한 유일한 인물은 아니다.

그런데도 지석영이 우두법 전파자로 유명해진 이유는 일제강점기 한반도를 지배하던 일본의 기획과 홍보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조선인들은 천연두 예방 접종을 받지 않으려 심하게 저항 했다.

천연두는 천연두바이러스 감염으로 발생하는 전염병이다.

1980년 세계보건기구(WHO)가 천연두 근절을 선언하기 전까지, 천연두는 치사율 약 30%에 전염성도 매우 높은 위험한 병이었다. 특히 회복된 이후에도 65~85%의 사람들이 피부가 수포로 덮이는 후유증을 안고 살아야 했다. 조선 사람들에겐 ‘마마’라는 극존칭으로 불릴 만큼 무서운 존재였다.

지석영은 조선에 서양식 천연두 예방법인 ‘우두 접종법(우두법)’을 보급해 유명해졌다.

우두법은 천연두와 비슷하나 훨씬 독성이 적은 소의 전염성 질병인 ‘우두’에서 나온 면역 물질을 활용하는 예방법이다. 우두를 앓은 소의 고름이나 딱지에서 백신을 뽑아내 사람들에게 접종하면 훨씬 안전하게 천연두에 대한 면역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지석영은 1876년 수신사 일행으로 일본에 다녀온 아버지의 친구이자 본인의 스승 박영선을 통해 우두법을 소개하는 책 ‘종두귀감’을 구해 읽고 우두법에 대해 알게 됐다.

1879년에는 부산의 제생의원에서 일본인 의사 마쓰마에 유즈루에게 두 달 동안 의술을 배우며 접종법을 익혔다. 그는 부산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처가가 있는 충주 덕산에 들러 두 살배기 처남에게 우두를 접종해 그 효험을 실험했다.

그러나 우두법을 더 널리 보편화하기 위해 우두에 걸린 소에서 뽑아낸 면역 물질인 ‘두묘’를 직접 만들고 관리할 줄 알아야 했다.

이에 따라 지석영은 1880년 5월, 수신사를 따라 일본에 직접 가서 일본인 의사에게 두묘 제조법과 저장법을 학습하고 돌아오기도 했다. 1880년 9월에는 사비를 들여 서울에 우두국을 설치하고 우두법을 보급했다.

그렇다면 지석영이 조선에 우두법을 소개하기 전까지 조선 사람들은 천연두에 꼼짝없이 당하고만 있었을까.

사실 조선에는 이미 천연두 예방법안 ‘인두법’이 있었다.

인두법은 우두법과 달리 천연두를 앓은 사람의 상처에서 백신을 뽑아 다른 사람들에게 접종하는 방식이었다.

조선에 인두법이 소개된 때는 18세기 초엽이었다. 이때부터 1894년 우두법이 종두법(천연두 예방접종)의 공식적인 용어로 확정되기 이전까지 종두법이란 인두법을 의미했다.

지석영이 우두법을 전파시키던 1880년대 조선 정부가 우두법을 공식적으로 천연두 예방법으로 확정한 이래로 인두법은 금지됐다.

우두법과 달리 인두법은 치사율이 1~2%에 이를 정도로 위험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두법은 민간에서 이미 널리 통용된 예방법이었다.

조선에서 인두법이 얼마나 효과적이었는지는 통계 자료가 없어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서양에서 같은 방법이 천연두 사망률을 크게 줄인 사실을 보면 조선 사회에서도 인두법이 집단 면역력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줬을 것으로 보인다.

지석영은 우두법을 최초로, 혹은 유일하게 조선에 소개한 사람도 아니다.

조선에 우두법을 소개한 최초의 문헌은 정약용이 1798년에 편찬한 의서 ‘마과회통’이었다.

다른 조선 후기 실학자인 최한기가 쓴 ‘신기천험’에는 우두법이 정약용의 책보다 더 자세하게 소개됐다.

뿐만 아니라 이재하, 최창진, 이유현 등의 조선 의사들도 지석영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우두법을 알았다. 지석영만 유일하게 우두법을 배우고 조선에 소개한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우두법을 전파시킨 사람=지석영’이라고 알고 있을까.

그 이유는 지석영이 활동한 시대 분위기를 통해 살펴 볼 수 있다.

먼저 지석영은 조선 정부와 가까운 사이였다.

그는 조선 정부 인사였던 박영선을 통해 우두법을 알게됐다.

박영선은 일본에 다녀온 수신사의 일행이자, 서기부사과의 직책을 맡은 정부측 인사였다.

박영선을 통해 우두법을 알게 된 지석영은 직접 수신사를 따라 일본에 가서 일본인 의사에게 우두법을 배워오기도 했다.

이러한 사례는 지석영이 정부의 우두법 보급 네트워크 안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지석영은 1885년 충청도의 ‘우두교수관’에 임명돼 우두법 전문 의사를 양성했고 ‘우두신설’을 저술해 우두법을 정리하고 보급하는 데 힘썼다.

이것이 그를 조선의 우두법 보급을 대표하는 인물로 비춰지게 했다.

오점 친일

1887년 지석영은 갑신정변에 가담한 배후 인물로 지목되면서 전라도 신지도로 유배를 갔다.

이후 정부의 우두법 보급 정책에는 전혀 참여하지 못했다.

이렇게 소외됐던 그가 돌연 우두법의 전파자로 부활한 것은 40년 이상 지난 1928년 조선을 패망시키고 한반도를 통치하던 일본 조선총독부의 기획 때문이었다.

당시 총독부는 조선의 식민 통치를 정당화할 요소를 지석영의 행적에서 찾아냈다.

그를 ‘일본인에게서 (근대적) 우두법을 학습해 무지한 조선 사회에 의연히 우두법을 보급한 인물’로 각색한 것이다.

이 이야기는 ‘문명 국가 일본’이 ‘비과학적 조선’을 구원해 통치하게 됐음을 즉 일본의 조선 통치를 정당화하는 데 힘을 실어주는 근거로 쓰였다.

일본어를 잘하는 지석영은 일본군의 통역과 길 안내를 맡는 등 동학농민운동의 토벌에 도움을 주었다. 그 공을 인정받아 동래 부사가 되었다가 동래부 관찰사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동학농민운동 토벌에 적극적으로 가담했고, 또한 뒷날 이토 히로부미의 추도사를 낭독한 친일 행적은 그 일생에 큰 오점으로 남는다.

지석영은 1890년대 후반 독립협회의 주요 회원으로 활약하면서, 밀 재배의 경제성을 설파하고 주시경과 함께 한글 가로쓰기를 주장한 선각자호 활동하기도 했다.

1899년 지석영의 청원에 따라 최초의 관립의학교가 설립되었고 그는 이 학교의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모태라 할 수 있는 의학교다.

서울대병원 의생명연구원이 2013년 역사전시회의실 지석영홀 개관식을 가진 이유다. 의생명연구원은 지난 2011년 설립 20주년을 맞이해 ‘의생명연구원 20년사’를 발간한 바 있다.

1910년 사직해 나라를 일본에 빼앗긴 뒤 그는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은둔의 삶을 살다 1935년 2월 1일 81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조선총독부에서 협력을 부탁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고, 3․1운동 등 독립운동에도 별다른 활동을 보이지 않았다.

지석영이 조선 우두법의 역사에서 두드러졌던 인물이라는 점,

그가 일본인에게서 우두법을 배웠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여러 사실을 고려하지 않고 한 개인의 업적을 위인전 만들어 칭송하게 되면 부지불식간에 영웅주의의 함정에 빠질 수 있다.

아직도 지석영에 대한 상당한 책자가 일제에 의해 만들어진 신화에 의존하는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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