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일보】 김흥순 = 대한제국의 황궁 정문 대한문

원래 덕수궁 터는 남이(1441~1468) 장군 역모사건에 연루된 조영달의 집터였다. 역모사건으로 집이 몰수된 뒤 영응대군(세종의 여덟째 아들·1434~1467)의 부인에게 돌아갔다가 성종(재위 1469~1494)의 형인 월산대군(1454~1488·추존왕 덕종의 맏아들)의 사저가 됐다.

그때 땅은 명동성당 까지를 포함한다. 그러다 임진왜란 발발로 모든 궁궐이 소실되자 선조(재위 1567~1608)가 이곳을 임시거처로 사용했다. 이후 우여곡절을 겪고 궁궐의 면모를 갖췄다.

고종이 선포한(1897년) 대한제국 황궁으로 탈바꿈 된 곳이다.

덕수궁 정문 이름은 원래 대안문’이었다.

이 대안문이 대한문으로 바뀌는 과정에 일제 이등박문의 딸 배정자와 관련이 있다.

‘대안(大安)’은 ‘크게(大) 편안하다(安)’는 뜻이다.

‘대안문’이 ‘대한문’으로 바꿨는지 알아보자. 문화재청이 2007년 궁궐 현판을 일제조사하면서 그 유래를 밝혔다. 1906년 대안문을 수리하면서 이름을 대한문으로 고치는 과정을 기록한 <경운궁(덕수궁)중건도감의궤> 중 ‘대한문상량문’을 찾았다.

“황하가 맑아지는 천재일우의 시운을 맞았으므로 국운이 길이 창대해질 것이고 한양이 억만년 이어갈 터전에 자리했으니…‘대한(大漢)’이라는 정문을 세운다…소한(宵漢·하늘)과 운한(雲漢·은하)의 뜻을 취했으니 덕이 하늘에 합치되도다.”

한마디로 ‘한양이 창대해진다’는 뜻으로 ‘대한(大漢)’이라는 이름을 썼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대한(大韓)’도 아니고 굳이 ‘클 대(大)’에 중국을 의미하는 한나라 ‘한(漢)’자를 쓴 이유가 무엇이냐는 여론도 만만치 않았다. 이 한(漢)자에는 ‘놈’이라는 욕도 포함되어 있다. 게다가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시점이라 온갖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대중잡지 <별건곤> 1933년 7월1일자에 실린 기사. ‘팔자고친 경성시내 6대문의 신세타령’이라는 제목으로 덕수궁 대안문이 대한문으로 바뀐 일화를 전한다.

“원래는 대안문(大安門)이었는데 ‘안(安)’자가 계집 ‘녀(女)’ 자에 갓쓴 글자이고 양장하고 모자 쓴 여자인 배정자의 대궐 출입이 빈번해 ‘상서롭지 못하다’는 말쟁이의 말로 인해 대한문으로 고쳤다”고 썼다.

대중잡지 <별건곤> 1933년 7월1일자에 실린 기사. ‘팔자고친 경성시내 6대문의 신세타령’이라는 제목으로 덕수궁 대안문이 대한문으로 바뀐 일화를 전한다.

“원래는 대안문(大安門)이었는데 ‘안(安)’자가 계집 ‘녀(女)’ 자에 갓쓴 글자이고 양장하고 모자 쓴 여자인 배정자의 대궐 출입이 빈번해서 ‘상서롭지 못하다’는 말쟁이의 말로 인해 대한문으로 고쳤다”고 썼다.

‘요화’ 배정자 관련설

‘요화(妖花·요사스런 꽃)’라는 별명으로 지탄을 받아온 여자 밀정 배정자(1870~1952)를 둘러싼 일화다.

일제강점기 대중잡지 <별건곤> 제33집(1933년 7월 1일자)에 실린 ‘대한문’ 관련 기사를 보면 기사 제목은 ‘팔자고친 경성 시내 6대문 신세타령’이다.

“(덕수궁의 정문은) 원래 대안문(大安門)이었다. 그런데 ‘안(安)’자가 계집 ‘녀(女)’ 자에 갓쓴 글자이고 양장하고 모자 쓴 여자인 배정자의 대궐 출입이 빈번해서 ‘상서롭지 못하다’는 구설수로 인해 대한문으로 고쳤다.”

(대한문 준공 때부터) 조선의 국운은 점점 서산에 떨어지는 해와 같고 별별 무서운 꼴 우스운 꼴을 다보고 겪었다. 을사늑약(1905년), 정미조약(1907년) 모든 문서도 다 이 문안에서 꾸몄다. 마지막으로 고종이 승하해서 여러 사람의 울음을 겪었다.”

기사에 등장한 배정자는 일본명 다야마 사다코(田山貞子)로 알려진 매국노이자 일제 간첩이었다.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 구속된 여성 6명 가운데 가장 먼저 체포된 인물이었다.

배정자는 1870년(고종 7) 경남 김해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배분남이다. 밀양부 아전이었던 아버지(배지홍)의 딸로 태어났다. 4살이 되던 해(1873년) 아버지가 세도가인 민씨 일가에게 처형됐고, 이 충격으로 시력을 잃은 어머니와 함께 문전걸식을 하는 신세가 됐다.

그러다 12살 되던 해부터 계향이라는 이름으로 기생이 된다.

잠시 여승이 되었다가 아버지가 모셨던 밀양부사 정병하(1849~1896)의 주선으로 일본에 건너간다. 그때 갑신정변 실패로 망명 중이던 김옥균(1851~1894)과 안경수(1853~1900)의 눈에 띄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1841~1909)를 알게 된다.

(1)田山貞子(다야마 사다코), 1870년 2월 23일 ~ 1952년 2월 27일

(2)경상남도 김해 출생,본명 배분남(粉南),일본 외교부,군부 스파이

(3)이토 히로부미 애첩? '조선 흑치마' 한국의 마타하리?

생부가 민씨 일파에게 처형당한 뒤 연좌법에 의해 관비가 된 어머니를 따라 여러 곳을 떠돌아 다니다 밀양 기생으로 팔려갔으나 탈출, 1882년(고종 19년) 여승이 되었다.

1885년 일본으로 도피하여 1887년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가 되었다. 그 후 일본 정부로부터 밀정 교육을 받고 1894년 귀국하여 대한제국과 일제 강점기에 일본의 밀정으로 활동했다.

1920년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 때는 만주, 시베리아를 오가며 군사 스파이로 활약했다. 그 후 간도, 상하이 등지에서 독립운동가들의 체포를 위해 암약하다가 1927년 은퇴했다. 1949년 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에 친일 반역자로 체포되었다.

영화인 이철은 그의 딸 현송자의 두 번째 남편이며 일제 강점기의 영화인 배구자의 고모다.

배정자는 김해 밀양부 아전의 딸로 태어났다. 아비 배지홍(裵祉洪)은 세무관리를 역임했으나 민씨 정권에 반대하다가 1873년 흥선대원군이 실각한 후 그 졸당(卒黨)으로 몰려 대구 감영에 수감되었다가 사형당하였다

어머니는 충격으로 시각 장애인이 되어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다. 이후 연좌제에 의해 죄적(罪籍)에 올라 천민이 되어 어머니를 따라 각지를 유랑하였다. 이후 경상남도 밀양에 기생으로 팔려갔으나, 도주하여 양산군 통도사로 들어가 12살 때 우담(耦潭)이라는 승명으로 여승으로 활동하며 3년간 수도생활을 하였다.

이후 정체가 탄로나 수배되자 14살 때 도망쳐서, 아버지와 친분 관계가 있던 동래부사 정병화(鄭秉和)의 보호를 받았다

다시 아버지 지인의 도움으로 밀양부사로 전임한 정병하(鄭秉夏)의 주선으로 1885년 무역상 마츠오(松尾)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갔는데, 이때 인맥을 통해 안경수를 만나게 되었다. 당시 갑신정변 실패로 일본에 망명해 있던 안경수의 도움을 받아 배정자는 상강(尙綱) 여학교를 다녔다.

안경수의 주선으로 김옥균을 만나 알게 되었고 이토 히로부미와도 만나게 되었다. 이후 안경수, 김옥균 등에게 의탁하다가 미모가 빼어났다고 전해지는 배정자는 이토 히로부미의 눈에 들어 1887년 그의 수양딸이 되었다.

이토는 배정자를 수양딸처럼 자기집에 머무르게 하면서 이름도 지어주고 밀정으로서 필요한 모든 것을 가르쳤다. 이토의 도움으로 24세에 다시 조선으로 돌아온 배정자는 고종한데 접근해 정보를 빼내고, 미인계를 사용해 일본의 밀정으로 활동하며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할때 막후에서 활약하며, 고종의 러시아 아관파천도 정보를 빼내 방해하였다.

이토가 죽은 후, 만주로 건너가 일진회 옛 잔당들을 모아 만주 최대 친일단체인 보민회의 배후인물로 활동하면서, 일본 총영사관 직원으로, 또는 일본의 군사 스파이로 수많은 조선의 독립 운동가들을 체포하는데 앞장섰다.

귀국해서는 각종 첩보를 총독부에 제공해 그 공로를 인정받아 땅도 증여받고 월급도 받으면서 한가롭게 지냈다. 태평양 전쟁때는 70대의 노구를 이끌고 백여 명의 조선 여성들을 군인들을 위문한다는 구실로 남양군도까지 데려간 뒤, 위안부 생활을 강요하고 거기에 따른 업자들의 금품도 받아 챙겼다.

해방이후 몰래 숨어살던 79세의 배정자는 친일파 여성 6인중에 제일 먼저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지만 반민특위 해산으로 얼마 있지 않아 바로 석방되었다가 1952년 한국 전쟁중 서울에서 사망하였다.

밝혀진 기록만으로 본 배정자의 화려한 남성편력과 자식

(1)일본에서 조선 유학생 전재식을 만나 아들이 하나 있음(아들 전유화)

대구 중군(中軍) 전도후(田道後)의 아들 전재식(田在植)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그의 도일로 두 사람은 헤어졌다가 전재식이 일본으로 유학을 오면서 재회, 결혼을 하였다.전재식과의 사이에서 아들 전유화(田有和)를 두었다. 그러나 게이오 의숙(慶應義塾)에 재학 중이던 전재식이 병사하자 두 사람의 인연은 끝이 났다.

(2)일본 제국 공사관의 조선어 교사였던 현영운과 재혼(딸 현송자)

(3)현영운의 후배 박영철과 결혼 또 이혼

(4)일본인 오하시(大橋)

(5)은행원 최(崔)모

(6)전라도 갑부 조(趙)모

(7)대구 부호 2세 정(鄭)모

(8)대륙전선에 투입됐을 때는 중국인 마적 두목과 동거

(9)1924년 57세에 밀정생활 은퇴 뒤 25세의 일본인 순사와 동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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