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일보】 김흥순 = 역사 시간에 들은 바로는 372년 중국 전진에서 고구려로, 384년 중국 동진에서 백제로, 5세기에 고구려 묵호자에 의해 신라로, 6세기에 백제의 노리사치계에 의해 일본으로 전래되었다.

고구려, 백제의 불교 전래과정은 국가적 사절을 매개로 한 외교적 통로에 의한 전래였다. 신라 불교의 초기 전래는 눌지마립간(417∼458) 무렵이었다. 눌지왕 때 고구려로부터 무명인에 의해 전래되었으나 성과를 얻지 못했다.

소지왕 때 일선군(一善郡:善山) 지방 모례(毛禮)의 집에서 아도(阿道)가 전도했으나 이 역시 박해 속에 끝났다.

521년(법흥왕 남조(南朝)인 양(梁)나라와 국교를 맺은 후 양나라 무제(武帝)가 보낸 승려 원표(元表)에 의하여 비로소 신라 왕실에 불교가 알려졌다.

법흥왕은 불교를 수용하고 이를 진흥시키려 하였다가 귀족의 반대로 실패하고 왕의 총애를 받던 이차돈(異次頓)마저 순교하게 되었다(527). 법흥왕은 불법을 성하게 한 왕이라는 뜻이다.

당시 귀족들은 전통적인 무격 신앙에 빠져 있었다. 이때 이차돈이 순교를 결심했다. "가장 버리기 어려운 것이 목숨입니다. 하지만 저녁에 죽어 아침에 불교가 받들어질 수 있다면, 임금께서는 길이 편안하실 것입니다."

이차돈은 경주의 울창한 숲을 베어 절을 짓기 시작했다. 귀족들은 법흥왕에게 절을 짓는 이유를 따져 물었다. 법흥왕은 그런 일이 없다며 부정했고, 대신 이차돈을 잡아들여 목을 베었다.

흰 피를 뿌리면서 이차돈이 죽었을 때 하늘에서는 꽃비가 내렸다. 이차돈의 신비로운 죽음은 귀족들의 마음을 돌려놓았다. 마침내 법흥왕이 뜻한 대로 불교를 믿을 수 있게 되었다.

삼국유사는 이 부분을 미화했다.

대왕(법흥왕)은 위엄을 갖추고 사방에 무시무시한 형구(刑具)를 벌려 놓고 군신을 불러 물었다. "내가 절을 지으려고 하는데 그대들은 일부러 못하게 하는가."

왕이 이차돈을 불러 문책하였다. 이차돈은 얼굴색이 변하여 아무 말도 못하였다. 대왕이 분노하여 목을 베라 명하였다. 옥리가 목을 베자 흰 젖이 한 길이나 솟았고, 하늘이 침침하여 햇빛이 흐려지고 땅이 진동하고 하늘에서 꽃이 내려왔다. 왕은 슬퍼하여 눈물이 곤룡포를 적시었고 재상들은 놀라서 땀이 관까지 내번지었다.(『삼국유사』)

이차돈 설화는 삼국이 불교를 받아들일 때 왕실과 귀족들 사이에 많은 진통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삼국에서 불교를 받아들이는 데에 선도적인 역할을 한 것은 왕실로, 특히 신라에서는 법흥왕이 이차돈의 순교를 빌미 삼아 불교를 공인하였다. 이는 6세기에 행정 제도 정비, 율령 반포 등 중앙 집권 체제를 갖춤에 따라 왕실이 귀족을 누를 수 있을 정도로 강화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문종훈 교수의 불교 논문에 의하면 신라 불교 공인은 진흥왕 5년이다

신라 불교가 공인된 때가 법흥왕 14년이 아니라 진흥왕 5년이란 주장이 제기돼 학계의 관심을 끌었다. 불교 공인을 위해 순교한 이차돈은 개인의 이름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승려를 통칭하는 말이라는 주장도 함께 제기됐다.

문경현(경북대) 교수는 <민족문화학술논총>에 신라불교 초전 고라는 논문을 게재하고, 이 같은 주장을 폈었다. 문 교수는 진흥왕 5년(544)에 흥륜사가 완성돼 3월에 사람들이 출가해 승려가 되어 부처를 받드는 것을 허가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에 주목했다.

신라 최초의 절인 흥륜사가 창건된 이 때가 정식으로 불교가 공인된 해라는 것이다. 법흥왕은 생전에 모즉지(牟卽智) 또는 원종(原宗)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며, 법흥왕이라는 시호는 그가 죽은 뒤 참 불교를 일으킨 왕으로 자처했던 진흥왕(眞興王)이 전왕을 추존하기 위해 올린 것이라고 밝혔다.

흥륜사의 주지가 된 사람 역시 진흥왕으로 그의 법명은 법운(法雲)이었다.특히 이차돈은 위촉(蝟觸)으로도 기록되고 있는데, 고슴도치를 뜻하는 신라의 옛말 잇에서 온 것으로, 숨어서 활동하던 불교 비공인 시대의 승려를 지칭하던 보통명사였다는 것이다.

이 같은 근거로 이차돈의 가계에 대한 기록이 어떤 데는 박씨로, 어떤 데는 김씨로, 어떤 데는 석씨로 등장하는 등 조작된 순교자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주장했다.

불교는 왕권을 강화하고 귀족의 특권을 정당화하는 데 유리한 사상이었다. 불교 사상 가운데 윤회(輪廻)가 있다. 진골 귀족들은 현세에서 여러 가지 특권을 누리고 있는 최고 귀족 계층이었다.

진골들은 전생에 공덕을 많이 쌓았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이처럼 불교는 귀족의 지위와 특권을 인정하는 데 도움이 되는 사상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그 이점을 최대한 이용해야 하는 왕과 귀족이 불교 공인에 함께 동의했던 것이다.

불교는 왕권 강화에 도움이 되었다.

불교를 믿는 백성 역시 하나의 불법에 귀의하는 신도인 동시에 국왕을 받드는 같은 신민이었다.

불교는 국왕을 중심으로 백성을 하나로 묶는 데 기여했다.

나중에는 왕이 곧 부처라는 왕즉불 사상까지 확립되었다. 신라의 왕들은 전생에 부처였다고 강변했다.

왕의 이름만 보아도 법흥왕, 진흥왕, 진지왕, 진평왕, 선덕여왕, 진덕여왕까지 불교식 이름이다. 특히 진평왕은 다른 왕보다 더욱 불교적인 세계를 추구했다.

자신을 석가의 아버지 이름과 같은 백정이라 칭했다. 왕비는 석가의 어머니 이름을 따서 마야부인이라 했고, 왕실과 석가모니 가문을 동일하게 만들고자 했다.

신라 불교는 현세적인 경향이 강했다. 질병을 고치는 등의 개인적인 복을 빌거나, 전쟁에서의 승리를 비는 등 국가의 발전을 바라는 것이었다.

개인적인 복을 비는 것은 불교가 토착 신앙을 포섭하면서 널리 보급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샤머니즘적인 성격이 강하게 나타났다. 국가 평화를 비는 행사도 자주 개최되었다. 호국적인 성격도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를 계기로 불교가 공인되고 중단했던 흥륜사(興輪寺) 창건 공사가 다시 시작되었다(535). 이와 같이 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왕실에서 불교를 수용한 원인은 왕권 중심의 지배체제를 유지하는 정신적 지주로서 적합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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