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일보】 김흥순 =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D'où venons-nous? Que sommes-nous? Où allons-nous?”

"Where are we from? What are we? Where are we going?“

고갱의 유명한 그림 “D'où venons-nous? Que sommes-nous? Où allons-nous?”에 나오는 질문이다.

불어로 된 세 질문은 고갱이 그린 그림의 왼쪽 위에 쓰여 있다. 이 질문을 번역하면,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라 번역할 수 있겠다.

철학자나 종교인들이 던진 화두 같은 이 말은 프랑스 탈인상주의 화가 폴 고갱의 작품명 이름이다.

‘세상에 고갱의 작품이 모두 사라져도 이 작품만은 꼭 지켜내야 한다’고 할 정도로 139㎝×375cm의 대작이다.

그림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그림에서 고갱은 근본적 의문을 시각화하고 있다.

두루마리를 펼치듯 오른쪽에 아기와 젊은 세 여자를 배치해 어디서 왔는지에 대한 의문을 던진다.

금단의 열매에 손을 대는 중앙의 청년을 통해 누구인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왼쪽 끝에 앉은 노파에게서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인간의 두려움을 보여 준다.

그녀의 왼쪽 눈에서 흐르는 한줄기 눈물. 두 눈에서 흐르는 눈물보다 깊은 연민을 부른다. 노파 뒤로 두 손을 든 신상이 ‘저 너머 세상’을 상징한다고 고갱은 말했다. 그리고 예수의 성모처럼 흰 새가 도마뱀을 발로 눌러 악을 벌하고 있다. 한 여인은 이 단죄를 피해 조개 속에 몸을 숨긴 채 두려움에 떨고 있다.

고갱은 왜 ‘3가지 질문’을 던졌을까.

고흐가 귀를 잘라 창녀에게 주도록 원인을 제공한 고갱.

그는 자살을 꿈꾸며 영혼을 쏟아 부은 이 작품을 통해 탄생과 화려한 삶과 죽음이 하나라는 화두를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물리학자들도 그림을 연구한다.

물리학은 영어로 피직스(Physics)다.

어원은 헬라어에 뿌리를 두고 있다. 헬라어나 고대 그리스어로 물리학은 피지케(φυσική)다.

그 뜻은 '자연의 지식'이다.

그러니까 물리학이라는 학문이 담고 있는 뜻은 중국 남송 시대 유학자인 주희(朱熹)가 <대학장구(大學章句)>에서 언급한 유교용어 격물치지(格物致知)와 맞닿는다.

풀어 말하면 '사물의 이치를 궁극까지 파헤쳐 지식을 극진한 데 이르도록 하는 것'이 물리학이다.

그러면 오늘날 물리학은 무엇을 연구할까?

물리학의 분야는 몹시 넓어 짧은 지면에 다 담기 어렵지만, 분야를 뭉뚱그려 '입자물리학, 핵물리학, 천체물리학, 응집물질물리학, 통계물리학, 원자 및 분자물리학, 광학' 정도로 분류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 분류가 엄밀한 건 아니다.

서로 겹치기도 하고 타 분야에서 나온 이론이나 실험을 서로 사용하기도 한다. 입자물리학이나 핵물리학은 환원적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물질을 이루는 가장 작은 단위에 천착하지만, 통계물리학이나 응집물질물리학처럼 원자나 분자들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모여 있을 때 새롭게 나타나는 현상을 다루는 분야도 있다.

종교물리학도 나올 판이다.

오늘날에는 사회 현상과 경제학, 생물학도 물리학의 대상이 되기도 하므로, 물리학은 경제학이나 사회학, 생물학이나 심리학과도 연관된다.

오늘날 입자물리학과 핵물리학, 천체물리학에서 무엇을 연구하는지 짧게 소개하려고 한다. 이 세 분야는 우주를 서로 다른 위치에 바라보는 세 사람에 빗대 '세 사람의 물리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종교의 삼위일체 같다.

이 분야를 연구하는 물리학자들 마음속에 커다란 질문 세 가지가 있다.

폴 고갱의 세 가지 질문이다.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D'où venons-nous? Que sommes-nous? Où allons-nous?”

고갱은 11 살 때부터 16 살이 될 때까지 프랑스 오를레앙 외곽에 있는 가톨릭 신학교를 다녔다.

가톨릭 교리 수업은 오를레앙 주교가 가르쳤다.

그는 이 수업에서 한 인간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으로 이 세 가지를 들었다.

고갱은 훗날 기독교에 극렬하게 반대했지만, 이 세 질문만큼은 그의 마음속에 깊이 담아 두었다.

고갱은 예술의 목적이 작품을 통해 이 세 가지 질문을 던지는 것에 있다고 여겼다.

프랑스를 떠나 타히티로 간 고갱은 1896년에 이 위대한 예술 작품을 그렸다. 이 그림은 현재 미국 보스턴 미술관에 걸려 있다.

이 세 가지 질문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관심 가질만한 질문이다.

인문학자나 철학자도 이 질문의 답을 찾으려고 애쓰지만, 물리학자도 마찬가지로 이 질문의 답을 찾으려고 궁구한다.

종교 신앙인도 질문에 답을 찾는다.

워낙 근원적이라 쉽게 답을 찾기도 어려울뿐더러 해답의 근처에 가는 데 필요한 비용도 엄청나다.

어렵울수록 간단하고 단순하게 보는 것도 재주다.

광양마을 매화가 한창이다.

벚꽃을 비롯한 풍년화 영산홍, 개나리, 복수초, 현호색, 노루귀 같은 봄꽃들이 흐드러지게 필 것이다.

한 폭의 고갱 그림처럼 아직은 탄생과 죽음, 겨울과 봄이 공존하는 시간이다.

금단의 열매에 유혹된 아담과 이브의 삶이 끝내는 뱀같은 노파의 한줄기 눈물로 귀착된다는, 고갱의 목숨을 건 웅변이 차가운 바람으로 다가선다.

미국 철학자 마르쿠제 말처럼 세상은 ‘풍요로운 감옥’이다.

어제 대건 안드레아 사제의 후손 신부님의 개혁해야할 성직자 중심주의의 끝내주는 신학이야기를 듣고 홀연히 떠난 친구 어머니를 문상하기 위해 1억 짜리 볼보를 운전하는 친구의 차를 타고 돌아 다닌 세상,

떠나는 겨울의 뒷모습을 풍요로운 세상 감옥의 창으로 담담하게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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