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일보】 김흥순  = 1781년 3월 18일 프랑스 재정개혁가 튀르고(Turgot) 사망, 콩도르세의 개혁실패와 프랑스 대혁명

지금 한국경제는 18세기 프랑스와 비슷하다.

돈을 더 푸느냐 긴축을 통한 재정개혁을 하느냐의 기로다.

17세기와 18세기 프랑스의 역사는 구조개혁을 하지 않은 채 통화 발행을 통해 경제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경제가 파탄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역사적 사례는 프랑스에만 일어난 일이 아니다. 20세기에 영국과 독일에서도 일어났다. 오늘날 경제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아르헨티나와 베네수엘라가 대표 국가들이다.

한국경제가 지속적으로 추락하고 있다. 올해 경제성장률은 1%대에 불과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폐업하는 자영업자가 속출하고 일자리를 잃어 실업급여로 생계를 잇는 사람이 대폭 증가했다.

설비투자가 줄고, 이자비용도 내지 못하는 한계기업들이 늘어나고 있다.기업의 경제활동이 극도로 위축되고 있으며 해외로 빠져 나가는 기업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런데도 정부는 민간경제 활동을 가로막고 있는 제도개혁은 하지 않은 채 돈을 풀고 재정 투입에만 집착하고 있다.

관료가 아직도 국민과 기업을 가르치고 이끌려는 후진적 리더십을 보이고 있다.

기준금리를 연 1.25%로 0.25%포인트 인하한 것은 물론이고, 제로금리 이야기까지 흘리고 있다. 올해 대규모 슈퍼예산에 추가경정예산을 심심하면 꺼내며 정부의 지출을 더욱 늘리겠다고 한다.

지금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돈을 푸는 것이 아니다. 기업에 대한 규제와 간섭을 줄이고 노동시장 개혁을 비롯한 구조개혁을 단행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경제는 과거 여러 국가들이 경험한 경제 파탄을 겪을 것이다.

17세기 후반과 18세기 내내 프랑스는 심각한 경제 문제와 재정 문제에 시달렸다.

많은 국민들이 식료품 부족에 시달렸고, 국가는 끊임없이 파산 일보직전에 내몰렸다. 루이14세 때 재무부 장관을 역임한 콜베르의 중상주의 정책과 루이14세 및 그 후계자들의 방만한 재정 지출 탓이었다.

콜베르는 수출이 수입보다 많은 것이 국가에 유리하다는 토마스 먼(Mun)의 ‘무역차액설’을 믿고 수출은 늘리고 수입을 줄이고자 했다.

이를 위해 무역을 비롯한 여러 부문에 대해 세세하게 규제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국가의 자급자족을 달성하고 국가의 부를 축적하고자 했다.

콜베르의 정책은 프랑스의 경제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루이14세에 이어 루이15세가 5세때 왕에 올랐다. 어린 루이15세를 대신해 오를레앙 공 필리프 2세가 섭정을 했다.

당시 프랑스는 루이14세의 방만한 재정운용으로 국가가 파산위기에 처해 있었다. 오를레앙 공은 경제와 재정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고 하는 스코틀랜드에서 온 존 로를 영입했다.

존 로는 경제와 재정 문제를 통화 부족으로 봤다. 그래서 그는 방크제너랄을 설립했다가 방크로얄로 국유화해 기존의 금화를 배제시키고 불환지폐인 방크로얄의 은행권으로 대체했다.

그리고 인도회사(Compagnie des Indes)를 설립해 정부 채권을 인수하는 대가로 미시시피 지역에서의 배타적인 무역 독점권을 부여받았다. 정부 채권을 회수하기 위해 이 회사의 주식을 발행하며, 방크로얄을 통해 투자자들에게 인도회사의 주식매입 대금을 대출해주는 편의를 제공했다.

인도회사의 신주 발행 때마다 은행권 발행 한도를 늘렸다. 이런 은행권 남발로 인도회사의 주식가격이 폭등했다가 폭락했다. 이 사건이 바로 그 유명한 ‘미시시피 버블’이다. 은행권의 남발로 인한 결과는 인플레이션이었고 경제 파탄이었다.

루이14세의 경제정책에 대한 초기 비판가들 중의 한 명이 피에르 드 부아길베르(Boisguilbert)였다.

그는 국가는 안전과 정의를 확립하는 역할만 하고 나머지는 자연스럽게 내버려 두는 것(laissez faire la nature)이 국가경제에 이롭다는 주장을 했다.

반세기 후 루이15세 때 부아길베르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중농주의자 케네(Quesnay)는 통치자의 생각을 바꿔 놓으려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커다란 변화를 일으키지는 못했다.

루이16세가 왕위에 오른 1774년 튀르고(Turgot)가 재무장관에 임명되었다.

그는 중농주의자의 그룹에 속해 있지는 않았지만 경제정책에 관련해 중농주의자들의 불간섭주의(laissez faire)를 지지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불간섭주의(laissez faire)에 입각해 개혁에 착수했다.

수년 간 괴롭혀 온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곡물 교역을 자유화하고, 많은 산업에 대해 진입을 제한했던 길드를 폐지했다.

강제노동으로 해오던 도로건설을 지주들에 대한 과세를 통해 그 건설비용을 조달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런 조치들은 수많은 기득권과 충돌했다.

그 반대자들이 루이16세를 움직여 그를 실각시킴에 따라 그의 개혁도 자연스럽게 폐기되었다. 튀르고 실패 이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다. 만일 튀르고의 개혁이 성공했다면 산업혁명이 프랑스에서 먼저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프랑스의 정치가이자 경제학자이며, 백과전서(百科全書)에도 기고한 진보적 중농주의자인 안 로베르 자크 튀르고(프랑스어: Anne Robert Jacques Turgot)

그는 상공업에 대한 국가의 과도한 간섭에 비판적이었다. 여러 전쟁으로 왕실 재정이 형편없던 시기에, 케네의 영향을 받은 튀르고는 재무총감의 자리에 올랐다. 시민계급의 자긍심과 귀족계급에 대한 반발심이 증가하던 시기였다.

1776년 그는 6개항의 개혁조치를 내놓았다. 6개항중 특권 길드를 없애고 부역을 폐지하며 지주들에게서 세금을 걷는 중농주의적 안은 반대파들의 격렬한 저항을 불러왔다.

특히 징세를 하는 것에 대한 귀족계급의 엄청난 반발로, 튀르고는 개혁안을 내놓은 지 불과 몇 달 만에 해임됐다. 그로부터 13년이 지나서 프랑스는 대혁명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되었다.

튀르고는 루이 16세의 스승인 모르파 백작에 의해 장관으로 낙점 받았다.

해양장관으로 임명될 수 있었으나 1774년 7월 20일 계몽사상가들(philosophes)의 반대로 승인을 받지 못했다.

8월 24일 튀르고는 재정총감으로 임명되었다. 그가 왕에게 제출한 세 가지 원칙은 '파산 없음, 세금 인상 없음, 차입 없음'이었다. 당시의 재정 상황은 절망적이었고, 튀르고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정책을 여러 부서에 대해 시행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로 인해 모든 부서의 지출은 반드시 재정총감의 승인을 받아야 하고, 한직에 있는 사람들은 압박을 받는 등의 변화가 일어났다. 튀르고는 개인적으로 왕의 사치에 대해서도 반대 입장을 표명하였다. 이러한 것들 외에도 그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개혁을 시도하였다.

이러한 튀르고의 정책은 적자 폭을 감소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국가신용도를 향상시켜 그의 퇴임 직전에는 네덜란드의 은행가들로부터 4%의 이자로 대출이 가능해질 정도였다.

여전히 적자폭은 너무 커 튀르고가 시행하고자 하였던 간접세로 치환, 토지세의 일원화 등은 시행되지 못하였다. 그는 여러 물품입시세와 다른 작은 의무들을 축소시키는 데에는 성공하였다. 튀르고는 경제적인 관점에서 프랑스의 미국 독립 전쟁 참전을 반대하였으나, 결국 프랑스는 참전을 했다.

튀르고의 사임은 기득권은 좋은 변화를 싫어한다는 사실이다.

비슷한 시기 튀르고 친구인 콩도르세(Marquis de Condorcet)는 적분학에 관한 논문으로 경력을 시작한 계몽사상가, 철학자. 수학자, 정치가였다. 수학자로서 세계적 명성을 쌓은 그는 경제학자 튀르고와 친구가 되었다.

루이 15세와 16세 치하에서 높은 관직에 있던 튀르고를 통해 콩도르세는 파리 주조국의 조사관으로 임명된 뒤 점차 철학과 정치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인권에 관심이 높아, 특히 흑인과 여성의 권리를 옹호했다. 그것은 계몽사상가들 사이에서도 현저하게 진보적인 행동이었다.

프랑스 혁명에서는 온건파로서 의무교육과 여성 참정권을 강조하는 헌법 초안을 작성했으나 과격파가 다수를 점령한 의회에서 부결되었다. 루이 16세에 대한 재판에는 찬성했지만 처형에는 반대했고, 과격파의 헌법에 반대한 이유로 그에게 ‘반역자’의 낙인이 찍혔다.

반년 남짓 도피한 기간에 쓴 <인간 정신의 진보에 관한 역사적 개요>는 체포된 지 이틀 만에 의문의 죽음을 맞은 그의 유작이 되었다. 그것은 계몽주의 역사관을 확연히 드러낸다.

완벽한 인간 존재는 없기에 인류의 진보는 불가피하게 지속되어야 한다. 인간은 완벽한 이상 사회를 향해 계속 진전해야 한다. 그것이 가능하려면 인간은 인종·종교·문화·성별과 무관하게 연합해야 한다.

우리는 다수결로 진행되는 민주주의의위험한 법칙을 보고 있다.

콩도르세의 역설(Condorcet’s paradox)이다.

최다득표제가 유권자의 선호도를 정확하게 반영하지 못하는 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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