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세종=청주일보】김흥순 =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의 날(1)

Columbus Day (observed) [2nd monday in Oct], 10월 두번째 월요일 콜롬부스 데이-스페인을 비롯한 중남미 스페인어권 기념일. 1492년 10월 12일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날을 기념하는 날.

콜롬부스에 대해 2009년 미국 미네소타 대학에서 모의재판이 열렸었다.

'피고 크리스토퍼 콜롬부스에게 3백50년의 사회 봉사령을 命한다'

노예범죄,학살,강도등 10개 범죄로 기소된 콜롬부스에 대한 모의재판이 미국 미네소타 대학에서 열려 약 12시간에 걸친 심리끝에 7개의 죄목에대해 유죄판결이 내려졌다.

콜롬부스의 신대륙 도착 5백주년을 맞아 미네소타大 법학부 인권센터는 모험자 콜롬부스가 美대륙 원주민과 조우를 통해 야기시킨 역사적 사실을 수정하기위해 모의재판을 열었다.

이탈리아인, .인디언. 흑인. 교사. 학생 등을 포함한 남여 12명의 배심원은 이날 10개의 범죄중 노예범죄.살인.강제노동.유괴.폭행.고문.절도등에대해 유죄 평결했다.

그러나 부녀폭행. 테러. 학살등에 대해서는 평결이 엇갈려 결론이 나오지 않았다.

이에 따라 재판장은 유죄평결이 내려진 7개의 죄목에대해 각 50년, 합계 3백50년의 사회봉사활동 令을 선고했다.

변호인측은 『피고는 女王의 명령에 의해 당시의 기준으로 행동한데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으나 검찰측은 『당시의 법령이나 윤리에 따른다고 해도 콜롬부스의 행위는 범죄』라고 반박했다.

판결후 『그후 눈부신 과학의 발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5백년이 지난 현재 세계도처에서는 힘에의한 분쟁의 해결이 계속되고 있다』라는 ‘콜롬부스의 담화’가 발표됐다.
1492년 8월 3일, 콜럼버스는 이사벨 여왕이 제공한 90명의 선원과 3척의 배를 이끌고 팔로스 항을 떠났다. 산타마리아호를 비롯한 3척의 카라벨 범선은 비교적 순조로운 항해를 계속했다.

콜럼버스는 선원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 하루 동안 운항한 항해 거리를 실제보다 적은 숫자로 기록하는 한편, 자신만의 기록을 따로 보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서양은 콜럼버스의 계산보다 훨씬 큰 바다였다. 항해에 지친 선원들 사이에서 불평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팔로스 항을 출발한 지 69일째로 접어들면서 회항을 요구하는 선원들의 목소리가 거세질 무렵, 전방을 관측하던 로드리고 데 트리아나가 외쳤다. "육지다! 육지다!"

1492년 10월 12일, 드디어 육지에 상륙했다. 콜럼버스는 구세주와 관련시켜서 이 섬을 산살바도르(San Salvador, 구세주, 구원자)라고 명명했다.

콜럼버스는 모두 4번에 걸친 항해를 했다. 하지만 두 번째 항해부터는 서서히 몰락했다. 왕과 여왕은 콜럼버스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여러 차례 갈등이 있었지만, 콜럼버스는 페르난도와 이사벨이 지원해 준 작은 배 4척을 타고 1502년 5월 마지막 항해를 떠났다.

동참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이 항해에서도 금은보화를 찾지 못한 콜럼버스는 1년 동안 자메이카 해안에 갇혀 고생 하다가 1504년에 에스파냐로 돌아왔다. 그 해 그의 강력한 후원자였던 이사벨 여왕이 세상을 떠났다.

그녀와 함께 콜럼버스의 영광의 날들도 노을로 물들었다. 페르난도 왕은 그를 상대하지 않았다. 탐험가인 그는 좌절감과 관절염에 시달리다가 1506년 5월 21일 그가 그토록 가고 싶었던 동양의 꿈을 꾸면서 파란만장한 55년의 세상을 뒤로 하고 눈을 감았다. 에스파냐 왕실에서는 아무도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저작권자 © 청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