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세종=청주일보】김흥순 = 나치 정권은 독일의 광장 민주주의가 만들어낸 최악의 작품이다.

다른 것은 필요없다
말(연설)로 정권을 잡을 수 있다.
그 결과 선택은 혹독한 댓가일 뿐이다.

독일은 홀로코스트로부터 법치주의의 소중함을 배웠다.

이 교훈이 1949년 기본법에 담겨 있다. 기본법 20조는 “국가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규정과 함께 “국민은 선거를 통해 행정, 입법, 사법 등 삼권을 창출해 권력을 행사”하도록 정하고 있다. 국민이 권력을 삼권에 위임한 것이다.

1919년 탄생한 바이마르 공화국은 최초로 의회민주주의를 도입하고 복지제도를 갖춘 역사상 가장 민주적인 체제였다. 대통령제와 의회내각제의 혼합 형태인 바이마르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은 사민당의 대부 프리드리히 에버트였다. 에버트 총리는 1925년 임기 동안 공화국을 성공적으로 통치했다.

하지만 1929년 뉴욕 증시가 폭락하며 세계 경제가 침체의 늪에 빠졌다. ‘검은 목요일’로 유발된 세계 경제 위기는 곧바로 독일 경제에 치명타를 날렸다. 해외자본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이자는 급등했다.

기업이 연쇄적으로 파산했고 거리에는 실업자들이 넘쳤다. 산업생산이 급감했다. 철강생산은 한 해 65%나 급감하는 상황이었다. 사회복지비용의 급증했고 은행, 보험 등 금융기관이 도산했다. 대중은 분노와 좌절에 빠졌다.

불법시위와 집회, 정치적 활동이 난무하며 의회 시스템마저 붕괴했다. 의회는 나치제국당과 공산당에 의해 장악되었으며 강력한 카리스마를 갖춘 히틀러의 등장이 예고되었다. 히틀러는 대중을 매료시켰고 대중은 히틀러에게서 희망을 봤다.

이성은 마비되었고 광장의 소리가 모든 것을 지배했다. 유대인은 물론 장애인, 국적 없이 떠도는 집시족들이 광장의 박수 속에서 사라져갔다. 유대인 600만, 장애인 수십만 명, 100만의 집시족 들이 죽어나갔다.

무엇보다도 고리대금업 등 장사에 능했던 유대인들이 광장의 먹잇감이 되었다. 일본 관동대지진 때 조센징을 살해하던 수법 그대로였다.

홀로코스트!
독일은 지금도 나치 시대 지식인이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던 것을 매우 수치스럽게 생각한다.

일본인들의 집요함이나 성실성에 가끔 놀란다. 최근 일본 독문학자가 쓴 '히틀러 연설의 진실'이 그렇다. 히틀러가 25년간 했던 연설 가운데 558번의 연설문을 판독해서 150만개의 단어를 추출한 뒤, 즐겨 사용했던 단어와 목소리 높이, 제스처까지 분석하고 있는 책이다.

대개 히틀러의 연설이라고 하면, 힘차게 손을 휘두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선동가적 모습만 연상하기 쉽지만 가정법과 대비법, 점층법을 즐겨 사용해서, 연설의 극적 효과를 끌어올렸고, 속어적 표현도 능수능란하게 활용해 대중적 공감대를 넓혔다는 분석이다.

히틀러의 성공 비결이 그저 소리를 지르는 데만 있었던 건 아니라는 생각이다. 분명 '악당'일지언정 치밀하고 정교한 '악당'이었다. 그랬던 선동의 달인 히틀러가 전쟁 막판이었던 1945년 1월 30일 최후의 연설은 총리 관저 근처의 지하 방공호에서 청중 없이 홀로 녹음으로 했다는 것도 지독한 아이러니다.

결국 석달 뒤 히틀러는 지하 참호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자네 부대에 말재주를 휘두르는 천부적인 테너가 있다는 걸 알고 있나? ​일단 활기를 띠면 말이 끊이지 않는 듯하더군.” -​1918년 독일 뮌헨대의 역사학 교수는 교육 강습에 참여한 젊은 군인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주변 사람들에게 열변을 토하는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고 옛 친구인 대위에게 이렇게 말했다.

​창백하고 여윈 얼굴에 짧은 콧수염을 기른 그 군인이 바로 아돌프 히틀러였다.

저작권자 © 청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