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 이후 최고의 두뇌' 로자 룩셈부르크 (Rosalia Luxemburg)

【충북·세종=청주일보】김흥순 =“자유,언제나 그것은 적어도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한 존중이다”

“레닌은 방법론에서 완전히 틀렸다. 압류,체포,공장 책임자들에 대한 독재적 권한,가혹한 처벌,테러를 통한 지배,공포정치일 뿐이다”


1919년 1월 15일은 폴란드 출신의 독일 마르크스주의, 정치이론가며 사회주의자, 철학자 혁명가, 레닌주의 비평가인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가 암살 당한 날이다.

그녀의 마지막 날은 비참했다.

‘…1919년 1월15일 베를린의 밤.에덴호텔 중앙홀로 군인들은 한 유태인 여자를 질질 끌고나왔다.그녀를 둘러싼 독일친위대 소속 군인들은 그녀에게 야유와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저거 뭐야.그 늙은 창녀잖아!”한 군인이 그녀의 머리와 관자놀이를 개머리판으로 후려치고 있었다.패전(1차세계대전)후에 그들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독일황제의 퇴진과 군대의 해산을 요구하는 선동가 로자 룩셈부르크를 비밀리에 제거하기 위해 일을 저지른 것이다.

그녀의 입과 코에서 피덩어리가 물컹물컹 쏟아져내렸다.그녀의 시신은 란트베르카날 다리로 옮겨졌고 물 속으로 던져졌다.그녀의 암살자들은 나중에 히틀러의 권력장악을 도왔다…’ -미테랑정부에서 장관과 국회의원을 지낸 막스 갈로의 <로자 룩셈부르크 평전>중에서

유럽의 대표적 좌파 여성혁명가로 48세에 산화한 로자 룩셈부르크.칼 마르크스이후 ‘최고의 지성’으로 불리며 불꽃같은 삶을 살다 극우파 군인들에게 살해된 폴란드 출신 한 유태인 여성이다.

정치 경제학을 공부한 다음에 정치적 노선을 걸어갔다. 그미의 박사학위 논문은 자본 축적과 관련되는 것이었다.

칼 마르크스를 정통으로 계승했다는 혁명가 ‘붉은 로자’가 레닌과 스탈린식의 무자비한 사회주의의 추종자가 아니라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위한 이상주의자”였음을 끌어내기 위함이다.갈로는 로자가 당시 레닌에 필적했던 인물이며 레닌주의가 수반할 관료주의와 공포정치를 끊임없이 비판했음을 지적한다.저자는 로자가 꿈꾸던 세상은 현대에 더욱 의미가 있는 “혁명과 사회주의와 민주주의의 화해와 공존” “대중의 의지에 대한 존중”이라고 요약한다.

로자는 유럽 사회주의 운동사에 우뚝 선 걸출한 혁명가다. 폴란드인, 유태인, 다리를 저는 장애인, 여성이라는 4중고를 뚫고 자라난 지도자다.

로자의 별명은 무수히 많다. 그 중에서도 '붉은 로자', '혁명의 독수리', '마르크스 이후 최고의 두뇌' 등으로 불린다. 현실 사회주의의 실험이 인류에 짙은 그림자를 남기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지금까지 기억되는 몇 안 되는 사회주의 혁명가의 한 사람인 로자 룩셈부르크는 혁명가 이전에 한 사람의 여성으로 삶은 불꽃 그 자체다.

땅딸막한 절름발이 유대인 여성으로 태어나 평생 투옥과 항쟁으로 점철된 삶을 살았던 여성이다.

폴란드 남동부 자모슈치 지방에서 태어난 그녀는 유대계였고 자유주의적 지적 분위기를 가졌으며 경제적으로도 유복한 가정이었다. 5남매 중 막내였으며, 5살 때 병을 앓아 엉덩이 통증으로 인해 잘 걷지 못했다.

어릴때, 가족은 바르샤바로 이주했고 그녀는 그 곳에서 학창시절을 보내며 동유럽 유대인의 세계시민주의의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다. 이는 그녀가 폴란드어, 러시아어, 독일어, 프랑스어, 영어, 이탈리아어도 능숙하게 구사할수 있는 조건이 됐다.

그녀는 독일적 부르주아지 전통 속에서 성장했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제정 러시아 정부의 반정부주의자 탄압에 분노해 정치적으로 선회했다. 그녀는 유대 혁명 서클에 가담해 반정부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러시아 정부 수배자로 스위스로 망명하게 된다.

스위스 취리히 대학 철학부는 여자이며 유대인인 그녀를 받아들였다. 법학부로 학적을 옮겨 국민경제학과 공법학에 대해 공부했다. 이 곳에서 마르크스주의자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한 다.

1898년에는 제2차 인터내셔널의 가장 큰 정당인 독일 사회민주당에 입당했고, 그 해 슈투트가르트에서 있었던 전당대회에서부터 그녀는 두각을 나타낸다.

1905년의 1차 러시아 혁명은 그녀의 입장을 급진화시키는 계기가 됐다. 그녀는 바르샤바로 달려가 투쟁에 동참했으며, 그로 인해 러시아 정부는 로자에게 1906년 두 달의 금고형을 선고했다.

1911년에는 인터내셔널 사회주의국의 구성원이 되었으며, 1914년 2월에는 반 군국주의 연설을 한 죄목으로 인해 독일 정부에 의해 1년 징역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이 형은 1915년 3월부터 집행된다.

1916년 2월 일시적으로 출옥했지만 다시 그해 7월부터 1918년 11월까지 보호관찰처분을 받은 그녀는 옥중에도 정치활동을 계속했다. 그녀는 개량주의적이고 관료적인 독일 사민당을 비판하며 급진 좌파 세력을 이끌었고 이어 결성된 스파르타쿠스단의 지도부에 참여했다.

룩셈부르크는 스파르타쿠스단 기관지인 《붉은 깃발》의 필자 중 한 명이었으며 1918년 12월 말 독일 공산당 창립 총회에서 연설을 행하기도 했다. 1919년 1월에는 스파르타쿠스단의 반란에 막후에서 참여하게 된다.

1919년 1월 15일 밤 이른바 의용군에게 체포된 룩셈부르크는 심한 욕설과 함께 개머리판에 가격당하고 살해되었고 시체는 운하 속으로 던져져 1919년 5월 31일까지 그 속에 잠겨 있었다. 이름 로자(Rosa)처럼 장미가 만발한 5월 31일, 차가우며 더러운 물 속을 떠돌던 그녀의 시체가 떠올라 극우파들의 참혹한 만행이 밝혀지고 살인자들은 법정에 세워진다.

이러한 박해와 암살은 그녀의 동지들이었던 카를 리프크네히트, 레오 요기헤스, 후고 하세, 쿠르트 아이즈너 등에게도 가해진 일이었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시신은 사망한 지 90년 만에 베를린의 한 지하실에서 발견되었다. 그래서 기존의 로자 룩셈부르크의 묘가 엉뚱한 사람의 묘일지도 모른다는 것이 논란에 휩싸여 있다.

'비운의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는 무엇보다 민주주의에 헌신하고 더 나은 세상을 꿈꾼 '자유로운 영혼'으로, 감옥 창살에 찾아온 작은 새 한 마리와 이름 없는 들풀을 사랑한 따스한 인간이었다.

'혁명의 독수리'(레닌)이자 '혁명의 살아 있는 불꽃'(클라라 체트킨)이 그녀의 얼굴이듯이 감옥에서 새들을 위한 해바라기 씨앗을 부탁하는 따스함도 그녀의 얼굴이었다.

로자의 무덤이 있는 사회주의자 묘지에는 노동 운동이나 혁명 운동뿐 아니라 반 나치 투쟁이나 스페인 내전에 목숨을 바친 사람들의 비석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특히 묘지 한 가운데에 우뚝 솟아 있는 4m 높이의 거대한 기념비에 새겨진 글귀는 준엄하기 그지없다.

기념비-'죽은 자가 우리에게 경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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