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세종=청주일보】김흥순 = 법의 탄생과 변화를 생각해보자.

약식이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헌법인 대한제국 헌법인 대한국 국제(大韓國國制)를 보면 "2조 대한제국의 정치는 이전으로 보면 500년 전래하시고 이후로 보면 만세에 걸쳐 불변하오실 전제정치이니라. 3조 대한국 대황제께옵서는 무한하온 군권(君權)을 향유하옵시나니 공법에 말한 바 자립정체이니라."라고 나온다.

이는 당시 서구유럽의 시민혁명의 성과가 아닌 기괴한 하이브리드 헌법(일종의 프랑켄슈타인 헌법)인 일본제국의 헌법을 거의 그대로 흉내냈다.

일단, 시민권에 대한 언급도 없고, 시민의 대표기관도 없는 철저한 전제정치의 법률이다. 이런 절대 권력의 전제국가라는 것은 사실 국가를 팔아 넘기기에도 좋은 것이다(국회가 있었다면 일제가 좀 더 힘들었을 것이다).

어찌보면 을사오적이니 정미칠적, 경술국적이니 하는 것은 허울좋은 책임 미루기이고 조선망국의 절대적인 책임은 고종과 명성황후, 두사람과 왕족, 집권층에 있다.

물론 배역자를 용서하지는 않아야하지만, 사치를 일삼고 권력을 왜곡하던 명성왕후가 "나는 조선의 국모다"라고 하는 이야기는 그야말로 역겨움이다. 죽음이 너무 비참하여 용서하지만, 그녀는 조선망국의 두번째 공신이다.


실제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근대적인 법이 들어온 것은 일제강점기다. 민법, 형법, 상법 등이 들어왔다. 이 법 들은 일본이 유럽에서 보고 배워 만든 법이다.

시민에 의해 만들어진 법이 아니고, 지배층이 부국강병을 위해 서양의 법을 들여온 것이다. 거기에 강력한 천황 숭배의 정신이 들어가 있다.

그나마 일본의 법 자체가 그대로 들어오지 않고 조선총독이 이를 변용하여 바꾸어 들어온다. 즉, 제국주의가 식민지를 효과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만든 법이다.

효율적인 통제와 인적, 물적 자원을 강탈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무의식 중에 행정부 중심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행정부 만이 일을 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이런 연원에서도 영향 받았다.

우리에게 국회라는 지역대표자의 회의는 매우 낯 선 것이다.

봉건주의 였던 일본 빼고 중앙집권적인 국가였던 아시아 국가에서는 국회는 매우 어색한 존재다. 거기에 우리 최초의 근대화 과정이 일제를 통한 경험(식민지라는 약탈을 당하는 피동적인 위치)이라는 것이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기업의 활동이나 재산강탈을 위해 총독부는 법률을 만들고 그런 법률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인원을 양성하는 학교를 만든다. 경성법학전문학교와 경성제국대학의 법문학부이다.

그 때부터 법률가는 식민지 정부의 통치 행위를 위해 봉사하는 전문가였다.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한 조선인 103명 중 해방 이후에 행적이 추적되는 사람이 93명인데 그 중 국회의원 37명, 장관 25명, 국무총리 2명, 법조인 64명, 대법관 14명, 대법원장 3명이 나왔다.

전봉덕과 같은 친일파가 변협회장을 하고 그의 딸인 전혜린이 우리나라 헌법학계의 태두인 김철수 교수(이분은 나름 학자의 양심을 지킨 분)와 결혼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어떻게 그 영향력 들이 내려오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인혁당 사법살인을 했던 민복기와 김기춘의 후견인이었던 신직수 역시 그런 사람 들이다.(신직수는 또다른 일제시대 법률가 출신 홍진기와 사돈을 맺는데 사위가 바로 중앙일보 사주 홍석현이다)

일본총독부는 또, 치안유지법이란 것도 만든다. 이게 국가보안법의 모법이다. 거의 베꼈다고 보면 된다.

'천황체제 부정 운동 단속에 관한 법률"이다.

독립운동을 탄압하기 위한 법이다. 이는 국가보안법으로 지금도 엄연히 그 핵심이 살아있다. 사상을 통제한다는 것은 민주주의 정신인 사상의 자유, 그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다.

국보법 찬성 주의자들은 지금도 이야기한다.

서울에서 김일성을 찬양하고 꽹과리 울리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국가보안법이 없다면, 그들의 활동, 대한민국에 대한 부정을 막을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의문이다.

일단, 그들의 반국가행위에 대해 처벌하면 되지 그들의 사상을 처벌할 수는 없다고 본다. 반국가행위는 당연히 형법으로 막을 수 있다.

또, 전쟁 기간에 만들어진 미국 헌법에 보면 "미국에 대한 반역죄는 미국에 대하여 전쟁을 일으키거나 또는 적에게 가담하여 원조 및 지원을 할 경우에만 성립한다."고 되어 있다.

이렇게 적용할 수도 있다. 북한은 우리에게 침략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현재도 휴전 중이다)이므로 이에 대한 정부의 허가 없이 원조와 지원을 하는 경우 충분히 처벌할 수 있지 않을까?


일제가 2차 대전에서 패망하고, 제헌의회가 열리고 제헌헌법이 만들어진다.

이 제헌헌법을 만든 이는 여럿이지만, 실질적인 핵심역할을 했던 사람은 유진오(고대총장이고 소설도 썼다)이다. 유진오 역시 경성제대를 나온 사람이다.

우리의 제헌헌법을 굳이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름 훌륭한 점이 꽤 있다. 또, 유진오의 친일 행위를 이 글에서 비난하려는 목적도 없다. 다만, 우리의 헌법은 여전히 일제의 법 전통을 이은 것이다.

일본 법은 유럽에서 상대적으로 법치에서 후진국이었던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의 법을 베낀 것이다. 봉건적인 황제국에서 일종의 흠정헌법 비슷한 그들의 법이 아무래도 일본의 천황제나 봉건제에 대해 좀 더 적용이 쉬웠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그 흔적이 아직도 우리에게 남아 있다.

식민지 국가의 법률 엘리트가 시민혁명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국가의 헌법을 만드는데 있어서 상상력의 한계, 통찰의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해방 이후에는 어찌보면 더 심하다. 일제강점기에는 2등 시민이라는 핑계라도 있었지만, 해방 이후에는 우리나라의 법률가는 대체로 부도덕한 국가 통치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역할을 일제시대보다 더 철저히 수행한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독재정치의 지원 세력이다. 이승만이 국회를 포위한 상태에서 발췌개헌을 하고 사사오입 개헌을 했을 때 법률가는 침묵했다. 박정희 때는 더욱 어이없다. 쿠데타라는 반란으로 집권한 세력을 위해 법은 봉사한다. 유신헌법에 저항했던 법률가는 커녕 헌법학자도 거의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일제시대부터 내려온 전통이겠지만, 독재시대에는 반국가와 반정부를 구분하지 않는다. 즉, 반정부를 반국가로 취급하고 대응한다. 이것은 어찌보면 그들이 얼마나 독재 정권의 주요한 동맹자였는지 보여준다.

법은 일종의 실용적 출세 도구이다.

법학과에 입학하는 학생치고 고시합격을 꿈꾸지 않는 사람이 없다(예전 법학과 어느 선배는 "밥 먹으려 법한다"는 위트를 하기도 했다). 집안에서는 조선시대 대과급제와 같은 것으로 생각하고 후원하고 지원한다. 법률을 공부하는 사람은 법의 정신이 아니라 시험에 합격하기 위한 공부를 한다.

소위 "수험법학"이다. 법학이라는 학문은 다른 사회 과학과 매우 다른 것 같다. 다른 학문은 사회현상에 대한 과학적 분석과 해석을 한다고 하면, 법학은 법률이라는 텍스트를 가지고 끝없이 주석을 달고 해석을 하는 행위(유교경전에 대해 주석을 다는 전통과 비슷하다. 유교는 거의가 주석학이다)였다.

어찌보면 법률 자체를 고민하기 보다는 그 적용을 고민하는 것이었다. 물론 형법이나 이런 것에는 자연법과 같은 철학적 배경이 있고, 민법에는 사유재산제나 시장 원리의 이념이 들어가 있다. 또, 법률 해석에서 법률의 취지가 주요한 해석 기반이긴 하다.

하지만, 분명히 공부하는 자는 현상의 기저를 살펴보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텍스트를 현상에 어떻게 적용하고 그것이 사회적으로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인가만을 고민하게 되어있다. 당연한 것이지만, 법학의 한계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일제와 독재시대를 통해 법률에 종사하는 사람 중 상당수는 어찌보면 양심과 현실을 철저히 구분하는 이중성을 가지지 않으면 안되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개인의 고민과 성찰로 이르렀는지는 모르겠으나 잠재적으로 이중성의 문제에 (묵시적이라 하더라도)스스로 동의를 했을 것이라 본다. 물론 많은 변호사 들이 법의 지식과 뜨거운 마음으로 독재와 처절히 싸웠다. 지금도 다양한 분야에서 시민의 권리를 위해 싸우고 있다. 검사나 판사 중에서도 거대 권력과 싸운 분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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