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세종=청주일보】김흥순 = 1. 1차 세계 대전의 결과 윌슨 민족 자결주의
2. 3.1운동 및 독립운동 기폭제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의 수도인 도쿄 한복판에서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던 2.8독립선언이 오늘로 100년이 됐다.

1919년 2월 8일.

도쿄 한복판에서 우리 유학생 600여 명이 모여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민족독립의 정당성과 항일투쟁 의지를 담은 독립선언서도 발표했다. 적국의 심장부에서 울려 퍼진 2.8 독립선언은 3.1 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도화선이 됐다.

1919년 2월 8일 일본 유학생들이 YMCA회관에 모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독립선언서와 청원서를 낭독하였다.

2ㆍ8 이때의 모임은 뒤의 3ㆍ1운동의 불씨가 되었다.

독립운동가들이 독립운동을 활발히 중에 일본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던 한국인 유학생들은 ‘조선 청년 독립단’이라는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했다. 그들은 일본의 수도인 도쿄 중심부에서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2.8 독립 선언’을 발표했다.

독립 선언서를 여러 나라 대사관과 일본 언론, 조선 총독부 등에 보냈다. 일본이 독립 선언에 참여했던 유학생들을 감옥에 가두는 바람에 비록 실패했지만, 독립운동가들은 이 사건으로 큰 감동을 받았다.

이에 자극을 받아 국내의 독립운동가들은 손병희를 중심으로 33인의 민족 대표를 뽑았다. 천도교, 기독교, 불교 등 모든 종교계 지도자들이 하나로 모였다. 이들은 독립 선언서를 작성하고 전국의 주요 도시에서 만세 시위 운동을 계획하게 된다.

선언서를 작성하고 모임을 주도한 것은 남자유학생들이었지만, 일본에 유학하고 있던 소수의 여학생들도 여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2.8선언을 앞두고 2월 6일이 될 때까지 남학생들은 여자유학생 단체인 여자일본유학생학흥회에 아무런 소식도 전하지 않았다.

그러자 도쿄여자의학전문학교 학생인 황애덕은 “독립을 갈망하는 마음은 남녀가 어찌 다르겠느냐, 수레는 한쪽바퀴만으로는 달리지 못한다”고 열변을 토하면서 여학생들을 민족운동에서 소외시키는 남학생들의 태도를 비판하였다.

그리고 민족운동에 스스로 열렬히 참여하였는데, 이 때 여학생들이 맡았던 역할은 주로 독립선언서의 밀송과 유포였다.

일본은 일찍부터 조선유학생감독부를 설치하여 일본유학생들의 성적, 품행, 사상 등을 감시하기에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여자유학생들에 대한 감시는 소홀하였다.

유학을 통제할 정도로 여자유학생들의 수가 많지 않았고 조선여성들은 오랫동안 집안에 갇혀 있으면서 사회정세에는 전혀 관심이 없을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1918년 3월에 도쿄여의전으로 유학을 떠난 길정희는 “엄밀한 일본경찰의 조사도 여자인 까닭으로 간단하게 통과”했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러한 감시와 통제의 느슨함은 여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몸에 숨기고 조선 국내로 들어오는 배경이 되었다. 이때 크게 활약을 했던 사람은 여자유학생들의 대표적 존재였던 김마리아와 황애덕이었다. 당시 유학을 마치고 정신여학교 교사로 있던 나혜석 또한 김마리아 등과 연결하여 각지에 선전, 선동 활동을 하였다.

1920년 3월 1일에는 여자유학생들이 도쿄 히비야(日比谷) 공원에서 3ㆍ1운동 1주년을 기념하는 시위에 참가하여 황신덕, 현덕신 등 7명이 검거되기도 하였다.

누구보다 많이 배운 ‘깨인’ 신여성으로서 조선사회를 선도해야 한다는 사명감, 남성과 ‘똑같이’ 민족운동에 참여해야 민족의 일원으로서 인정받을 수 있다는 여성의식이 여자유학생들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하였다.

그러나 동등하다고 믿어진 민족들 사이에도 젠더분리는 여전히 존재했으며, 여성이 맡은 연락 등의 역할은 ‘똑같이’ 중요한 일로 취급되지는 않았다.

저작권자 © 청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