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북·세종=청주일보】독립운동가 김홍일 장군
【충북·세종=청주일보】김흥순 = 1980년 8월 8일 독립운동가 광복군 장군 김홍일(金弘壹)사망

"놈들의 발굽 아래 정의가 유린되고 민족으로서 혹은 인간으로서의 권리가 말살되는 이 마당에서 우리가 취할 길은 오로지 투쟁에 의해 국권을 회복하는 길밖에 없다고 나는 판단한 것이다.

또 일본 군국주의 세력의 파괴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역사가 우리에게 부여한 제일차적인 과업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러자면 한국인 스스로의 군비가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나는 느꼈던 것이다.

나는 그제서야 나라 잃은 백성으로서의 내가 장차 할 일이 무엇이겠는가를 확실히 깨달은 셈이다."-김홍일 선생의 회고록 '대륙의 분노' 중에서-

평북 용천에서 출생한 장군은 1918년 정주 오산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뒤 중국 상해로 중국 상해로 망명, 귀주성 육군강무학교를 거쳐 중국군 장교로 임관했다가 1920년에 상해 독립군 군비단에 투신했다.

장군은 이어 1921년 천보산에서 일본군과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뒤 시베리아 이만으로 옮겨 다른 독립군부대와 연합해 대한의용군군사위원회를 조직,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을 벌였다.

장군은 1922년 러시아 볼세비키 세력에 의해 부대가 해체되자 만주로 이동, 용 정의 명동중학교 교사로 재직하다가 1926년 중국 국민혁명군에 복직한뒤, 근무하며 독립운동가들에게 필요한 탄약을 제공했고, 1931년 이봉창과 윤봉길의사에게 폭탄을 제공, 거사를 지원했다.

1939년 중국군 소장으로 진급한 장군은 중국 제19집단군 총사령부 참모처장으로 근무하던중 김구선생의 권유로 1945년 6월 광복군 참모장에 취임, 미국 전략정보국(OSS)과 함께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하다가 일본의 항복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장군은 1948년 귀국, 육군사관학교 및 육군참모학교 교장과 시흥지구전투사령관, 육군 제1군단장, 육군종합학교 총장을 거쳐 1951년 중장으로 예편한뒤 외무부장관과 국회의원, 광복회장 등을 역임하다가 1980년 8월에 숨졌다.

정부는 장군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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